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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봉투

 

봉지 유령

 
'저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말과 달리 너무나 침착한 어투에 살짝 괴리감을 느끼긴 했지만 어쨌든 놀랄 만한 일이긴 했다. 알바생의 말을 듣고서 빙긋이 웃으면서 문밖을 내다봤다. 허연 유령. 문 바로 앞에서 희멀건 한 유령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저기요, 점장님, 이럴 땐 봉투 값 받아요, 말아요?'

며칠 전, 오후 알바생 하나가 나에게 물었다. 손님 한 사람이 컵라면에 김밥 하나, 음료수 하나를 사 가면서 봉투에 담아달라고 하자 계산을 해주던 알바 아이가 봉투 값을 주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손님 말하기를, 나 이 건물에 있어서 여기 매일 오는데 이렇게 장사하면 손님 떨어진다고 했단다. 바로 그 상황을 두고서 나중에 내게 질문을 했던 거다. 그 사람 입장에선 그냥 던진 한 마디겠지만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선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아주 무시무시한 충고다. 아마 이번이 두 번째였던 듯하다. 얼마 전 내가 직접 계산을 할 때도 같은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었거든. 앞머리에 이런 말도 딸려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서비스도 안 해주고 너무 빡빡하게 장사하면...'

유통업체에서 봉투 값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일종의 환불보증금 의미였다. 나중에 다시 봉투를 가져다주면 봉투 값을 되돌려주고 그 봉투를 다시 사용해서 쓸데없는 쓰레기를 줄이자는 취지였던 걸로 안다(이 부분은 확실히 모르겠다). 허나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발상이었다. 봉투를 다시 가져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설사 유통업체에서 되돌려 받은 봉투를 다른 손님에게 다시 제공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생각해보라. 꾸깃꾸깃한 봉투에 물건을 담아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그래서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에선 아예 봉투 값을 받지 않았고, 편의점의 경우는 단골이나 특정 물건을 구매할 경우 무상으로 봉투를 제공하는 곳이 많다. 다시 말해 의식의 변화를 동반시키지 않은 정책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나라 해서 다른 편의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봉투 값을 받아내긴 하지만 역시 낯이 익은 사람들(소위 단골들)에겐 쉽사리 '봉투값 20원이요'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봉투 값을 내고 어떤 사람은 내지 않는, 불평등한 상황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사실 내 잘못도 크다. 어쩌면 악착같이, 악귀같이 받아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최소한 잔돈 생기는 게 귀찮아서, 또는 쓸데없는 20원 쓰는 게 아까워서 물건을 들고 그냥 가시는 분들도 꽤 있으니 봉투 사용량을 상당 부분 줄이는 게 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장사꾼이 되다 보니 악귀가 되는 게 쉽지 않더란 얘기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상대로 비닐은 썩지 않으니 그 사용을 줄이자고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행히(?) 그 이후로 매장에서 그 손님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알바생 질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한테는 꼭 받아내'라고 한 내 답변을 듣기라도 한 걸까? 지금 현재 내 입장은 상당히 궁색하다. 비닐 봉투 사용을 줄이자는 의견에 찬성하면서도 매장에는 비닐 봉투를 다량으로 구비해 놓은 데다 누군가에겐 유상으로, 누군가에겐 무상으로 봉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궁색한 가운데에서도 굉장히 화가 날 때가 있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가 있나? 각종 포인트에 할인 혜택은 귀신같이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발 딛고 있는 땅엔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내가 일하고 있는 매장은 입구가 움푹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바람이 심한 날엔 문을 닫아놓으면 문 바로 앞에 조그만 회오리바람이 생길 때가 있다. 누군가 내다버린 허연 봉지가 문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휘휘. 춤을 추며 읊조린다. 난 불멸이다.

유령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데 엄마를 따라 들어온 아이 하나가 카운터 위에 과자를 휙 올려놓는다. 그리곤 알바 언니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빨리 계산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이랄까. 이 아이는 그 위에 물건을 올려놓으면 언니든, 오빠든 무언가로 삑 소리 나게 찍고서 계산해준다는 걸 안다. 어른들에게 배운 것이다. 나중에 이 아이 입에서도 서비스 어쩌고 하는 말이 조금의 부끄럼이나 미안함 없이 튀어 나올까?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했고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타협에 불과하고 자기 위안에 불과하겠지만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는 어른이 얼마나 추한지는 지금 이 세상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지 않는가. 굳이 더 덧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by 지킬 | 2009/02/08 18:08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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