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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끝과 시작

 
다니지 않던 길로 가는 건 참 오랜만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터벅터벅. 오늘은 삑삑 소리 나는 운동화도 신지 않았다. 캐주얼 정장에도 어울릴 법한 스니커즈를 신고 하나 둘 하나 둘. 그렇다고 해서 옷이 정장인 건 아니다. 말끔한 면바지에 니트, 두꺼운 점퍼. 작년인가 샀던 목에 털 달린 그 점퍼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음악을 듣다가도 목에 닿는 보드라움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도리도리. 신발까지 소리 나는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면 영락없는 애 어른이 될 뻔 했다. 하지만 오늘은 멀쩡한 어른이다. 그것도 면접을 앞둔 어른.

하루 전엔 물건을 꺼내다가 선반에서 뚝 떨어지는 거울을 낚아챘고, 이틀 전엔 사정없이 땅바닥에 떨어뜨린 유리컵이 '나 멀쩡해요' 라며 뜬금없는 단단함을 과시하며 반짝이는 미소를 던졌었다. 미신인 건 알지만 그래도 깨졌다면 무척 신경 쓰였을 거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 결과를 암시하는 전조들 쯤 되었을까? 면접 당일에도 날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 길을 나선 내 눈에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들어온 것이다. 빠알간 잠바를 입고 하늘을 보며 엄마 뒤를 쫓는 아이는 그 선명함이 인상적이었고, 거리 벤치에 앉아 손에 든 우유병을 땅바닥에 내던진 아이는 엄마를 쳐다보는 그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참 선명했다. 무엇이 그리 궁금했는지 엄마 꽁무니를 쫓는 대신 엉뚱한 방향으로 뒤뚱 걷는 아이도 있었고, 아이답지 않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모차 밖 세상을 스쳐 지나치는 아이도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것도 아닌데 그 날은 유난히 가는 길목마다 아이들이 하나씩 등장해서 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긴장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 날 면접은 참 편안하게 지나갔다. 어쩌면 결과가 이미 반쯤은 나와 있는 터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면접 장소로 가는 길에 아이들을 보며 한 눈을 팔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고. 공교롭게도 면접이 끝나고 일터로 가는 길에선 아이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대신 일을 시작하자 한 동안 뜸했던 손님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속으로 조용히 인사를 나눴다. 일을 하고 인사를 하고, 그렇게 하루가 갔다. 5년 가까이 함께 했던 사람들, 또는 그보다 짧은 시간을 마주쳤던 사람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뭐, 영영 못 만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매일 보던 사람들을 띄엄띄엄 봐야 한다는 사실은 내 감정을 보통 때와 똑같이 놔두질 않았다. 아쉬움, 미안함, 그 위로 교차되는 설렘과 두근거림. 끝과 함께 곧 시작이다.


2008년 11월

- 사람들만 즐비한 거리에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그걸 멍하니 쳐다보는 지킬. 다음 날, 같은 경로를 따라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또 머엉. 2~3일 후 같은 길 위에서 사람들이 격렬하게 싸웠다. 놀라 멍하니 쳐다보다 든 생각. 지나가던 고양이가 비웃고 지나가던 개가 욕할 종족들이로세. 만물의 염장, 사람.
- 이렇게 갑자기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로 장사를 하게 될 듯. 껌도 팔고 과자도 팔고. 껌집 사장, 지킬.
-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맞이하는 첫 주말. 제대로 몸살이 걸렸다. 몸에 열이 난다는 걸 확연히 느낄 정도.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맘이 허한 탓이리라.
- 마음이 여려서 이 일 저 일 얼버무리고 피하다 보면 어느 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착하기만 해선 절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 2008년 11월의 단어 : 끝

by 지킬 | 2008/11/30 15:34 | 달력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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