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드렁크 러브, 결코 흔치 않은 사랑 얘기 영화...또다른 현실

'punch drunk'는 뇌에 많은 충격과 손상을 받은 사람에게 주로 나타나는 뇌세포 손상증을 말한다. 혼수상태·정신불안·기억상실 등 급성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치매·실어증·반신불수·실인증(失認症) 등 만성 증세가 나타나기도 하며, 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그렇다면 'punch drunk love'라는 제목의 의미는 '커다란 충격처럼 쇼킹한,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사랑' 정도가 되겠다. 결국 영화가 러브 스토리란 얘기다. 맞다. 분명 사랑 얘기다. 하지만 '사랑'이란 단어 앞에 '그 흔한'이란 수식어는 결코 얼쩡거리지 못할 사랑 얘기다.

이 영화 자칫하면 아담 샌들러라는 배우 때문에 큰 낭패 볼 뻔 했다. 아니, 벌써 봤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까지 아담 샌들러는 감독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배우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감독이 누구건 아담 샌들러가 등장한 영화는 하나같이 과장된 미국식 코미디물이다(가장 최근작인 <첫키스만 50번째>는 그 아이디어 덕택에 우리 관객들에게 숨통을 틔워주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스타일이 다른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니다. 코미디인 건 맞다. 그러나 오버가 섞인 코미디는 아니고 풍자와 상징이 내재된 대단히 고급스런 코미디다.

배리란 캐릭터는 현대 남성을 대표한다. 누나 다섯에 여동생 하나란 가족 관계는 알게 모르게 여성으로부터 남성성을 강요받는 현대 남성들을 상징한다. 배리가 여섯 명의 누이들에게 주눅 들어 있는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 여성들에게 억눌린다. 그것은 성(性)적이든, 능력이든 모든 면에서 그렇다. 성(性)적으로 상대방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 사회생활에서 치고 올라오는 여성들보다 뒤쳐질 수 없다는 압박감은 남성들에게 대단히 커다란 스트레스를 안긴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가정을 이뤘다 해도 그 가정이 오히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이고, 가정이 없다면, 그리고 친구마저 없다면 의사소통의 통로는 전무하다. 그로 인한 외로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엉뚱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게 만든다. 일종의 빗나간 욕망이라고나 할까. 배리는 한 번도 비행기를 탄 적이 없으면서도 쿠폰을 모아 마일리지를 적립하려고 기를 쓴다. 그것도 평생 타고 다닐만한 엄청난 마일리지다. 이처럼 의사소통의 단절은 현대남성의 욕망을 이상한 방향으로 굴절시킨다.

설사 의사소통의 통로를 찾는다 해도 올바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비뚤어진 방식으로 대화의 상대를 찾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그 대상으로 폰섹스를 선택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그저 일회성으로 속내를 쏟아낼 수 있는, 어찌 보면 아주 간편한 수단이다. 그러나 영화가 묘사한 폰섹스는 그 익명성마저 보장되지 않으면서 배리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가한다. 계속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 때 그 때 풀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꾹꾹 눌러두기까지 한 스트레스는 내부에서 엄청난 분노로 변한 상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분노가 폭발하면서 상상치 못했던 폭력으로 형상화된다. 레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로 합리화되었지만 배리가 휘두른 폭력과 유타까지 쫓아가 끝장을 본 집념은 결국 현대인의 내재된 폭력성과 다를 바 없다.

그럼 이 영화는 시종일관 이렇게 어두운 현대남성의 단면만을 들춰내는가? 물론 아니다. 영화 내내 배리의 싸이코스러움은 단연 돋보이지만 레나와의 만남이 반복되면서 배리의 비정상성은 조금씩 수용 가능한 수위로 순화된다. 적당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배리의 모습이 길거리에 풀어놓은 맹견과 같았다면 영화가 끝날 즈음 배리는 목줄을 차고 주인과 함께 산책 나온 맹견과 같다. <펀치드렁크 러브>는 현대남성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 사랑을 내놓는다.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통제까지는 가능하다고 한다. 오르간을 들고서 레나에게 달려가는 배리는 곧 사랑으로 순화된 화약고 같은 현대 남성의 모습이다.

원제 : Punch-Drunk Love(2002년작)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 아담 샌들러(배리), 에밀리 왓슨(레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루이스 구즈만


덧글

  • Eskimo女 2004/12/08 01:55 # 답글

    정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은 주변 여성들에게 많이 억눌리나보군요? @_@ 궁금해요 진짜 ㅋㅋ
    흠, 이 영화, 나쁘진 않았는데, 레나를 만나면서 온순(-.-)해지는 속도가 앞의 억눌려 살아온 과정에 비해 넘 급격해서 적응하기 힘들었어요..ㅋ
    그래도 아담 샌들러의 팬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웠다죠 후후
  • shuai 2004/12/08 09:09 # 답글

    제가 얼핏 기억하기로 이 영화에 대해 나쁜 평이 없는것 같더군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전작인 매그놀리아도 아직 못봤구요.
  • 닥터지킬 2004/12/08 10:15 # 답글

    Eskimo女/ 아담 샌들러가 이런 연기를 보여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었죠. 팬이 아니더라도 빠져들 정도니까요...

    shuai/ 음... 저 역시 나쁜 평은 본 기억이 없네요. <매그놀리아>는 저도 아직 못 봤습니다.
  • In-flux 2004/12/08 13:02 # 답글

    배리 참으로 황폐한 사람인... 그에겐 풍금이 있었지만
    저처럼 황폐한 사람은 무엇이 있어야할지..궁금합니다
  • 닥터지킬 2004/12/08 16:48 # 답글

    음악을 좋아하시잖아요?^^
  • 단식광대 2004/12/08 22:17 # 답글

    네 눈알을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 라는 대사였던가요. 풉.
  • 닥터지킬 2004/12/09 00:10 # 답글

    혹시나 해서 imdb.com을 뒤졌더니 그 대사가 나와있네요. 그 전에 배리가 한 대사도 걸작이군요.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후려갈기고 싶어. 해머로 후려갈겨서 부셔버리고 싶을 만큼 예뻐'... 함부로 써 먹었다간 큰일나겠어요^^;
  • 마르스 2004/12/17 09:05 # 답글

    트랙백해주셔서 감사. 그런데, 여자형제가 7명 아니었나요?
  • 닥터지킬 2004/12/17 11:31 # 답글

    음... 7명이었나요? 제가 숫자 관념이 좀 약해서...
    어쨌든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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