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읽을거리...불끈!

원제 : the Sense of an Ending(2011년)
지은이 :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 그래.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조를 나눠서 연극을 한 적이 있다(그걸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연기는 둘째 치고 극본을 직접 써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우린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시간이 1년 정도 지났을 때 내가 그 연극에 대해 기억했던 건, 여자 아이가 극본을 썼고 극중 상대방이 나를 너무 세게 밀어서 내동댕이치듯 넘어졌었다는 거 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연극을 할 때 같은 조였던 아이들은 다 뿔뿔이 다른 반으로 흩어졌고 학교에선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체육 시간에 다른 반과 축구 시합을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나를 향한 어떤 아이의 커다란 적대감과 마주치게 됐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4학년 때 한 동안 내 짝이기도 했었고 아주 친한 건 아니었지만 서로 잘 어울렸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수제'라는 단어가 있다. 기본적으로 '직접 손으로 만든' 정도의 의미가 부여되지만 단어는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수제'가 '감자칩'과 결합되어 만들어진 '수제 감자칩'. 소설 속 토니는 식당에서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까닭에 더 얇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식당 종업원 입장에선 그저 '두터운' 감자칩이란 의미로 인식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둘 사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단순한 단어 하나가 이 정도인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삶은 오죽할까?

누군가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에 대한 해석은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거기에 시간까지 덧붙여져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넘어간다면 비슷함과 다름을 떠나서 아예 맞고 틀림의 문제를 따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우연. 누군가는 필연이라 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난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 삶을 끔찍한 현실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끔찍한 지옥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거든. 생각해 보라. 우연이 빚어낸 기가 막힌 상호 작용 하나만으로도 토니의 인생이 흔들린 판국에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필연이라면 도대체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겠는지.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 관계를 통해 퍼져 나가는 나비 효과를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예측 가능한 삶이 될 수 있을 진 몰라도 아마 책임이란 커다란 바위를 머리에 이고 인생이란 고행길을 돌파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필연이 아닌 우연이 추가되면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아예 불확실성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도 이걸 알 수가 없다. 예측 불가능할 뿐더러 나로 인해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수밖에 없는 불확실이란 것이 삶에 주어진 축복인 걸까? 가끔은 그렇단 생각이 들곤 하는데 내가 현실 도피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겠다. 앞으로도 그렇고.

체육 시간에 마주쳤던 그 적대감의 원인을 난 바로 깨우치질 못했다. 며칠, 어쩌면 몇 주가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아차렸던 거 같다. 4학년 시절 연극을 할 때 그 아이는 나와 같은 조였고, 극본을 담당한 두 아이 중 한 명이었다. 그 아이가 쓴 극본은 선택되지 못했고(다른 여자애의 극본이 선택됐다), 그 과정에서 난 그 아이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줄 만한 행동과 말을 했었다. 완전히 잊고 있다가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런 행동을 해 놓고 그 당시엔 왜 미안해하지 않았던 걸까? 그 엄청난 일을 왜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전과 달리 무서운 선배들과 종종 어울린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방어막을 치기라도 했던 걸까? 사건과 기억과 우연이 어우러져 일구어낸 삶의 한 모습. 그 모습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관계라는 것이, 그를 바탕으로 한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예감은 고사하고 현실에 대한 감을 잡아본 적도 없는 거 같다.


덧글

  • 이글루가 없어요 2014/02/22 20:56 # 삭제 답글

    적대감이 남아있고 안 남아있고는 완전히 주관적이지만, 때로는 본인도 기억못하는 적대감이 남아있기도 하죠. 그런면에서 그러한 적대감을 거부하는 연아와 그 적대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우리 국민들은 서로간에 소통이 안되는 것일까요? dedales영화를 찾다가 우연히 들어온 글에서 공감을 찾고 감히 덧글을 남깁니다.
  • 지킬 2014/02/23 10:58 #

    여유가 없는 거 아닐까 싶어요. 얼마 전 'k pop 스타'를 보는데 박진영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언젠가부터 우리 가요에서 간주가 사라졌다고. 1절이 끝나면 간주 없이 바로 2절로 넘어간다죠 아마. 김연아 선수와 달리 많은 대중들은 이뤄놓은 게 없다는 불안함 때문에 여유가 없어서 그럴 거에요. 또 어찌 보면 그런 경쟁 의식이 살벌한 세상 속에선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이글루가 없으시군요^^
댓글 입력 영역


메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