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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곰 인형

 
버스를 타고 지하철 신촌 역으로 가면서 연대 앞을 지날 때 즈음이었다. 무심히 밖을 내다보던 내 눈길에 무언가 이상한 게 들어왔다. 뭘까? 저게 뭐지? 흙으로 덮인 축대 중간 쯤,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참을 봤다. 다행히 버스가 신호에 걸려 제자리에 오래 서 있던 터라 난 그 정체를 알아내는 게 가능했다. 곰 인형. 품에 안으면 성인 여성 상체쯤은 충분히 가려버릴 만큼 커다란 곰 인형이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저리 내팽개쳐진 것일까? 어쩌면 아예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선물 받을 사람 품에 안기기도 전에 연인들의 변덕으로 저리 기구한 운명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버스가 움직이자 곰 인형이 한쪽으로 사라져갔다.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한 채 비스듬한 축대 중간 쯤 널브러진 곰 인형. 엎드려 있는 탓에 그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곰 인형이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시간이 흘렀다. 같은 날 오후. 볼일을 마치고 지하철 2호선을 기다린다. 신촌 역으로 가서 오전에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탄 칸에 커다란 곰 인형을 안은 사람이 있다. 색감도, 모양도 아까 그 곰 인형과 똑같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누군가에게 소중히 안겨 있다는 점. 뭐 이런 희한한 날이 다 있누? 속으로 투덜대면서 외면해보지만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버리고 간직하고. 그것이 삶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제대로 버릴 줄 모르고 제대로 간직할 줄 모르는 게 사람이라서 항상 삶이 안타깝고 두려운 것이 아닌가.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한 요즘, 내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택했는지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내가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 버려진 곰 인형처럼 아무 곳에서나 나뒹굴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사람이 힘이 들면 회피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 마련이다.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다짐해보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나약함에 휘둘리는 내가 어찌 미래를 장담할 수 있을까?

by 지킬 | 2008/12/15 13:09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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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미타민 at 2008/12/15 13:28
와... 스쳐가는 일상에서 이런 글을 뽑아 낼 수 있으시다니 부럽습니다.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한 요즘, 내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택했는지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라는 말이 너무나 공감가네요. 2008년을 돌아보며 버린 것과 얻은 것을 생각해 보니 한숨이 앞섭니다 ㅠ

Commented by 지킬 at 2008/12/16 18:57
항상 시간이 지나야 버린 것과 얻은 것이 명확해지죠.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한숨 한 번씩은 쉴 겁니다.
거의 똑같은, 그러면서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의 곰 인형이라면 너무 강렬한 일상에 해당되는지라... 저 뿐만 아니라 미타민님도 어떤 생각에 빠져들게끔 될 거예요^^
Commented at 2008/12/15 15: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킬 at 2008/12/16 18:59
자꾸 생각이 많아져서 그럴까요? 몇 년 전만 해도 참 단순했었는데 지금은 몇 살 더 먹은 만큼 복잡해졌어요. 그냥 복잡해지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어쩐지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구요.
Commented by 사은 at 2008/12/16 00:38
그렇게 큰 곰인형이. 저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버린 것을, 물건이든 제 한 부분이든, 나중에 갑자기 그립고 소중히 여겨져서 찾으려고 애쓰면서 미안해해요. 선택은 늘 두렵지만 회피할 수 없는데...
Commented by 지킬 at 2008/12/16 19:02
나중에 아쉬움을 안겨다주는 물건들이 살다보면 꼭 나타나더라구요. 제 일부분은... 글쎄요, 제 경우는 너무 고집스럽게 쥐고 있어서 참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던 듯해요. 변화를 두려워했던 탓이죠.
Commented by sesism at 2008/12/16 10:05
무엇을 버리고 택했는지는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아는 것 같아요. 그때 가서 잘했다 싶기도 후회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선택한 것을 잘 쥐고 지켜가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감히 지킬님께 이런 얘길 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그게 삶인 것 같습니다. ^^
Commented by 지킬 at 2008/12/16 19:05
등에 업힌 아이들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는게 삶인데 '감히'라는 단어는 빼놓으셔야 했어요. 제가 누구라고 감히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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