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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빠

 
토요일, 일요일 저녁이면 꼭 TV 앞에 있었다. <대왕세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마 지금까지 살면서 1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본 드라마는 이게 처음인 듯하다. CSI나 슈퍼내추럴 같은 미드들도 열심히 보긴 했으나 중간 중간 한두 편씩 빼 먹으면 그냥 넘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대왕세종>은 홈페이지 다시 보기로 기어이 챙기면서 끝까지 다 보고 말았다. 지난 한글날 주말 연속극 편성을 위해 무려 <대왕세종>이 결방되었을 때 내 인생 처음으로 '에이, X 같은 KBS'라 욕까지 했을 정도로 드라마 빠 노릇까지 해 봤다. 즐거운 경험이었달까.

내가 왜 이토록 이 드라마에 열중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추측해보면 이렇다. 처음은 태종 역을 맡았던 김영철이란 배우 때문이었던 거 같다. 왕으로서 보여줬던 카리스마와 여타 사극과 구별되는 어투가 나로 하여금 '어라?'하면서 이야기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선 '정치 드라마'를 표방하고 나섰던 이 드라마의 특징대로 정치꾼들의 대결과 그들의 대사들이 나를 휘어잡았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엔 선악이 없었다. 모두가 자기 소신을 가지고 움직였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들을 피와 칼로 다스렸고 정적들을 이용해 자신의 수족들을 쳐낸다. 왕세자는 자존감을 앞세우며 요동정벌을 주장하고, 부패하고 노쇠한 정치꾼은 자기 신념에 어긋나자 왕의 뒤통수를 친다. 허나 이 모든 것들을 드라마는 선악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를 자기 나름의 신념대로, 강력한 조선이라는 꿈을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그려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정치판은 한 편으론 현실적이지만 한 편으론 이상적이다. 등장인물들의 퇴장이 하나 같이 인상 깊게 그려질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선 문장에서 내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이유들 중 하나를 끄집어내는 게 가능하다. 바로 감성이다. 정치와 감성이 어울릴 법한 일이겠느냐마는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는 부분이 많았다. 퇴장하는 정치인들의 회한과 그들을 떠나보내는 왕의 심정에 이야기가 꽤나 심혈을 기울인 탓이다.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많은 대사들이 가슴을 울리다가 사라졌다. 지금 기억나는 대사는 마지막 회에 최만리가 시력을 거의 잃다시피 한 세종의 처지를 알아채고서 자신의 뜻을 꺾으며 읊조리는 말이다. 난 이 조선을 위한 당신의 헌신에 졌습니다... 그 헌신은 왜 가능했었을까? 이야기 속 세종은 자신에 대해, 주변 환경에 대해 수시로 분노하지만 그 분노의 방향을 웬만해선 타인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회에 이르러 왕은 자신의 분노를 관원 중 한 명에게 쏟아낸다. 한글 창제와 반포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관원의 입을 통해 '비루한 백성' 어쩌고 하는 말이 튀어나와서다. 세종은 화를 낸다. 감히 어디서 내 백성을 업신여기느냐고. 그 같은 사랑이 바로 헌신의 가장 깊은 뿌리일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세종이 백성과 자신에 대해 깨달았던 명확한 현실 인식,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정. 그런 것들이 세종을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역사로 만들어놓은 것이리라.

현실적인 정치판을 그려내고자 했음에도 일정 부분 이상 이상적인 정치판을 우겨넣고 만 정치 이야기. 그게 내 취향, 내 성향과 꼭 맞아떨어졌다. 어쩌면 세종이 대왕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현실에 이상을 우겨넣고야 말았던 그 능력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끝났다. 시원섭섭하다.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가 고마울 따름이다.

꼬리말) 드라마의 역사 왜곡을 대놓고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드라마의 교훈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by 지킬 | 2008/11/18 11:20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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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esism at 2008/11/18 11:47
어, 저 왠지 그 장면 본 것 같아요. 감히 어디서 내 백성을 업신여기느냐는. 저희 아빠가 대왕세종 굉장히 좋아하시거든요. 집에 틀어져 있으면 들려오는 김상경 목소리가 저는 좋더랍니다.
정말 시원섭섭하시겠어요 :)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19 11:12
저두 김상경 좋아해요. 미스캐스팅이란 얘기도 많았던 듯하지만 전 아무런 잡념없이 캐릭터에 몰두가 가능해서 아주 괜찮았던 캐스팅이었다 생각 중이죠^^
Commented by 시린콧날 at 2008/11/18 12:43
그 시간에 하는 대하드라마는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편이었는데, 그렇게나 열심히 보셨다니 '어떤 드라마였길래'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적어주신 기억나는 대사, 인상적이네요. 그 대사를 들으니 참 '이상적인 정치' 얘기였겠다 싶기도 하구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19 11:14
대부분 언론의 관련 기사는 이 이야기가 현실 정치를 담아놓은데 초점을 맞췄지만 제 보기엔 그 못지않게 이상적 정치상이 많이 포함된 듯했습니다. 현실과 이상을 오락가락하는 저로선 아주 딱 보기 좋은 드라마였던 셈이죠.
Commented by 도연 at 2008/11/18 13:15
저도 애착을 갖고 보곤 했었는데, 여러번 가슴 찡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충녕이 대궐을 한걸음씩 걸어나갈때마다 바닥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장면이네요. 사람을 소중히 끌어안는 충녕의 마음이 그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는듯한 연출이 감동적이었던거 같애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19 11:20
일종의 촬영 방식이나 편집에 관한 부분이라 뭐라 말하기 곤란하지만 <대왕세종>은 기존 KBS 사극에 비해 실험적 시도가 많지 않았나 싶어요. 직설보단 은유와 비유를 즐겨 사용했고, 수시로 등장하는 교차편집에, 한참 전 대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현재의 의미가 분명해지는 상황까지. 생각하는 재미에다 말씀하신 것처럼 감성을 자극받는 재미까지 있었다고나 할까요.
Commented by 시진이 at 2008/11/18 21:02
우와~ 정말로 열정적으로 '빠' 생활을 하셨었네요~! 열혈 애청자셨군요^^
저는 초반에 그 바람직한(?) 아역들 덕분에~~자꾸 보게 되었던~! (저는 늘 이런 식이죠ㅋ) 그런데 시간대를 옮긴 이후부터는, 너무 못 봤어요. 잠깐 잠깐씩, 인터넷상에서 이런 글들 혹은 사진들로, 어떠어떤 대사가 나왔더라, 라고 듣고는 혼자 상상하며 감동받고..하하. 사극이라 한번에 다시보려면 만만찮겠지만, 언제고 다시 천천히 보려구요.

저도 지난주에, 이 열혈 '빠' 생활을 마감했답니다. 끝나고 나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어요ㅠㅠ 절대로 저는 '시원'하지가 않고 아쉽기만 하네요..(짧아서 더 그런듯..ㅠㅠ) 그래두 요즘 다시, '그들이사는세상' 챙겨보는 재미에 빠져들고 있답니다~ 어제껄 못 봐서 지금 다시 챙겨 보려구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19 11:26
바람직한 아역들, 저도 참 좋아라 했죠^^ 제가 비록 '빠' 생활을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보기는... 엄두가 안 나는데요...;

제가 일하는 동네에 송혜교, 현빈이 촬영 나왔다 해서 웅성웅성 했던 적이 있어요. 남자들은 다 송혜교 얘기, 여자들은 다 현빈 얘기, 저는 그냥 뚱, 그러고 있었다죠^^
Commented by 시진이 at 2009/01/01 14:37
그나저나 맞다 참, 제가 젤 중요한 얘긴 쏙 빼먹고 저렇게만 적고 갔었던.....

당연히; 저 시점에 지난주라고 (혼자만) 말하면 당연히 '그' 드라마라 생각하고 전혀 다른 드라마임에도 빠생활을 마감했다는 동질감에서만 저러고 갔었는데, 하하하 제가 '짧아서 더' 아쉬워 했던 드라마...베토벤바이러스였답니다. (푸하핫..)

음. 저..저도;; 대왕세종은 사실 모조리 다시(가 아니라 거의 처음이지만..) 볼 엄두가 안 나요.
너무..너무 못 보고 지나버린게 많아서, ㅎㅎㅎ저런 마음이라도 먹을 수 있는 거랍니다^^
(혼자 주말마다 한편씩, 새로 달려볼까요. 후훗. -_-)

요즘은 다시.... 딱히 보고 있는 드라마가 없어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9/01/03 23:32
저는 베토벤 바이러스를 한 편도, 보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도 보지 않았어요. TV 드라마를 원래 잘 안 보는 편인데다가 처음 시작을 보지 않으면 아예 끝까지 보지 않는, 이상한 고집이 있는 터라...;

저도 요즘은 딱히 보고 있는 드라마가 없습니다. 뭐 드라마 뿐 아니라 딱히 보는 영화도 없군요; 일기예보만 아침마다 챙겨보고 있답니다. 일기예보 빠가 되고 있달까요--;
Commented by silent man at 2008/11/19 20:15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도 요즘 만큼 드라마 열심히 챙겨본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돕니다.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4, 히어로즈 시즌 3, 덱스터 시즌 3, 닥터 하우스 시즌 5에 얼마 전 끝난 베토베 바이러스까지. 어마어마하게 챙겨보고 있네요. 하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_~)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21 00:37
원래 공부는 하랄 때 안 하다가 미친 듯 몰아 하는 게 맛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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