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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시작

 
저 '이쁜이'라는 개는 심심하면 계속 짖어댄다. 난 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저 개는 마음에 안 든다. 막상 짖어야 할 때는 가만히 있고, 주인이나 집안사람들이 가면 짖어댄다. 언젠가 한 번 똥 위에 파리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몇 십 분을 짖어댔다. 똥개라 어쩔 수 없나 보다. 눈이 오면 입에다가 눈 덩이를 집어넣어 버려야지. -1988년 1월 28일 목요일-

체변인지, 채변인지를 내라고 했다. 하기가 귀찮아서 OO에게 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X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니'라는 말과 함께. -1989년 5월 17일 목요일-

내가 기억하는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지금처럼 무덤덤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들통 날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얘기는 다시 말해 완벽한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

여자 친구가 있으면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나도 여자 친구는 없지만... 하긴 역사 속에서도 여자 때문에 몸을 망친 위인들 허다하다. 또 재수생에게 술과 여자는 극약이라고 하던데. 하지만, 만약! 이 세상에 남자들만 있었다면 무슨 낙으로 살아갈 것인가?... 낄낄. -1989년 6월 25일 월요일-

유난히 재수 없게 구는 녀석이 한 명 있다. 목소리, 생김새, 뭐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렇게 눈치가 없는 녀석은 아닌데. -1989년 7월 3일 화요일-

난 많은 이들에게 공평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한 때는 그런 사람에 좀 더 가까워졌다는, 난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착각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하루가 정신없이 간다. OO가 와서 떠들고, 책상 앞에서 공부하다가 잠깐 나와서 쉬었다 들어가면 벌써 12시다. 문득 교과서에서 읽은 '원고지'란 제목의 희곡이 생각난다. 희망 없이 그저 바쁜 생활에 쫓겨만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나에겐 지금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 -1989년 7월 25일 수요일-

일요일에는 뭐든지 일이 잘 안된다. 매일 꽉 짜여진 일과 속에서 갑자기 해방이 되는,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는 그런 날에는 왠지 몸의 태엽이 느슨해진 기분이다. 그러기는 싫지만 어쩌면 이 커다란 사회의 부속품이 돼 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따로 떨어지면 아무 쓸모도 없어지는. -1989년 10월 21일 일요일-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절망, 그 암흑 속에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 여긴다. 희망. 정말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청소년 시절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짓궂은 면을 간직한 학생이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본능에 충실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나름의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존재였다. 난 평범한 아이였다. 그 평범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해 가라는 통보가 왔다. 벌써 그런 때가 됐나? 17살. 많은 나이도, 적은 나이도 아닌, 그런 활기에 찬 나이다. 그런데... 내가 벌써 어른이 되어 가고 있구나. 증명사진도 찍어놓고 괜히 마음이 설렌다. -1989년 8월 7일 월요일-

블로그를 만든지 4년째. 이제 5년째를 향해 가면서 지금 또 한 번의 시작을 한다. 또 한 번의 설렘을 품는다. 이 시작은 나를 단련시키고 쓰다듬어줄 거다. 다가올 언젠가는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보듬어 주리라 믿는다. 더불어 이 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도 잠깐의 여유를 베풀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조그만 욕심)을 품어본다.

하이드 : 2004년 11월 4일 첫 시작 후 붓방아 찧다 어찌 어찌 올린 글 총 861개

by 지킬 | 2008/11/04 01:01 | 달력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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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사은 at 2008/11/04 02:17
옛기록을 들춰보면 재미도 있고, 추억도 생각나고, 또 이전의 나를 다시 보게 되면서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5년째라, 오랜 시간이었어요. 이 곳이 지킬님께서 사용하시는 내내 지킬님께 편하고 좋은 곳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4주년 축하드려요. :)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05 01:37
거짓없는 옛 기록만이 가질 수 있는 묘한 힘이랄까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게 있는 듯해요.
축하 인사 감사드리구요, 저 역시 이 곳을 좋은 의미로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Commented at 2008/11/04 09: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05 01:47
저희 어머니와 얘기할 때 가끔 그런 느낌을 받아요. 특정 감정과 어우러져 먼 과거의 일을 쭉 끄집어내오실 때가 종종 있거든요.
저는 대학 졸업할 때 즈음 적어놓았던 일기를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지금 기억하고 있는 상황과 그 때 적어놓은 상황이 너무 다르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제 나름대로, 제 편한대로 각색을 했다고나 할까요.

애인이 답을 말해준다라... 긍정적인 사고 방식이네요. 저 역시 한창 나이 젊은이라 우기며 다음 시작점으로 가야겠습니다^^
Commented at 2008/11/04 10: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05 02:02
저도 일기 싫어해요. 방학 때 일기 한꺼번에 쓰는 거 역시 종종 했던 일이구요. 그런데 제 경우는 좀 별난 게... 새로운 필기구가 생겼을 때 이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일기를 쓰게 된 적이 많다는 거죠--; 중고등학교 때엔 국어 선생님이 만년필을 쓰라고 하는 통에 뜬금없이 일기를 쓰게 됐고, 또 어떤 때는 펜을 박스 단위로 선물 받고서 그 팬을 소비하려고 일기를 쓰기도 했다는...

문체는... 놀랄 정도로 지금과 비슷하더군요--; 문체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고방식까지. 저 때부터 한결같이 애늙은이였을지도TT 아마 닭살 돋는 내용이라도 미소는 짓게 될 거예요^^

멀쩡한 연도를 나이와 대비시키면 어느 때인가부터 시간의 공평함에 치를 떨게 되더군요. 저는 제 나이 5살만 다른 누군가에게 적선하고 싶어요!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8/11/04 17:17
20년 전 이야기라니...저도 이 블로그를 날려 먹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이걸 보며 얼굴이 화끈거릴 날이 오겠네요. (웃음)

4주년 감축드립니다. : )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05 02:06
저기... 그냥 '1988년 이야기라니...', 그게 안된다면 '20세기 때 이야기라니...' 정도로 말씀해주셔도 되는데. '20년 전 이야기라니...' 하니까 그 시간이 너무 엄청나게 엄습해옵니다TT
축하 고맙습니다^^
Commented by 시진이 at 2008/11/04 23:59
어쩜 4주년 기념 포스팅을 이렇게 소박하지만 멋들어지게 쨘 하고 내어놓으실 수 있으신건가요. 사실 전 이렇게 하질 못해서 몇주년,몇주년, 챙기지도 못하는거거든요. (그닥 챙길 입장도.. 없어지지나 않으니 다행ㅡ.ㅡ)

잠깐의 여유, 하니까 생각났는데, 밖에서 무지 졸리고 무료하고 따분하던 어떤 오후, 지킬님이 언젠가 쓰신 엘리베이터(였나? 가물가물...) 안에서 본 "아이"의 웃음, 에, 저두 헤~ 하고 같이 따라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참, 고마운 시간이었었다고.. 이제야;; 말씀 드리네요.^^

저도 감축~드리옵니다!~~!! ^^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05 02:13
책상 속 일기 꺼내 읽다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였죠. 시진이님은 항상 컴백 스페셜인 거 같던데 거기에 몇 주년까지 챙기시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 포스팅이 있었어요. 아직까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몇몇 웃음들이 있는데 그 아이 웃음도 그 중 하나죠. 제가 그래도 아이의 웃음을 제대로 글로 옮겼던 모양이네요.

축하 인사는 잘 받겠습니다^^
Commented by sesism at 2008/11/05 11:20
짝짝짝!
올해 최다 덧글의 유력후보인 저는 지킬님의 블로그에 무한한 찬양을 보냅니다. 연말엔 작년과 같이 메일인사도 할 거여요. 앞으로도 건필하시고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 늘 궁금했던 나이를 알아버린 거 있죠! 제가 예상한 그 연도네요 ^^
Commented by 지킬 at 2008/11/06 01:08
무한한 찬양을 보내실 것까지야...; 연말인사만으로도 차고 넘칠 거 같습니다^^ 올해도 최다 덧글 막강 후보로 남아주신데 대해 저 역시 인사를 드려야겠죠(꾸벅).

가끔씩 산수가 안될 때가 있어서... 전 나이 잊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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