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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들, 데굴데굴 90

 
1. 과일 가게

시장 입구 과일 가게. 뭘 좀 사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나 못지않게 고민하는 녀석이 한 녀석 더 있었다. 이 눔 몇 살이나 먹었을까? 머리에는 아기들 특유의 솜털 머리가 자리 잡았고 커다란 머리에 자그마한 몸통까지. 어쨌든 걸을 수는 있는 모양이고 아직 말은 못하는 듯하다. 아빠와 함께 장을 보러 온 건지 놀러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내 옆에서 잔뜩 쌓인 사과들을 노려본다. 이것도 만지작 저것도 만지작. 뒤에 쪼그려 앉아있던 아빠가 큰 손으로 사과 하나를 집었다 놓았는데 아이는 혹시라도 하나 가져갔나 싶어 아빠를 휙 쳐다본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됐는지 아빠 손을 뒤집어보기까지 한다. '사과 내가 고를 거야!' 아이의 의지가 엿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는 내가 계산하고 갈 때 즈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사과가 아니다. 아이가 손에 들고 자랑스러워하는 건 골판지.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사과 3개 2,000원' 그래, 요즘은 존재 자체보다 요구되는 가치가 훨씬 중요한 사회이긴 하다. 쪼그만 놈이 본질을 꿰뚫었네 그려.

2. 엘리베이터

힘든 하루였다. 쏟아져 들어오는 피로와 쏟아져 들어오는 스트레스. 이 둘 뿐이었다면 능히 버텨냈을 것이다. 허나 문제는 쏟아져 나오는 콧물이었다. 아침부터 알레르기성 비염에 시달렸더니만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입은 헤 벌어지고 눈은 살짝 감긴 상태. 막힌 코 때문에 입은 숨쉬기 바쁘고, 잔뜩 엉클어진 기분 때문에 눈에 맺힌 영상은 온통 일그러진다. 이럴 때면 아무도 날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아주 조그만 무언가가 나를 건드렸다. 그것도 아주 세게. 조그만 존재는 아주 무안했는지도 모른다. 꽉 깨무는 격한 애정 표현 때문에 엄마한테 혼났었거든. 그것도 처음 보는 나 같은 남정네 앞에서 말이지. 어쩌면 관심을 못 받아 살짝 화가 났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들고 있던 커다란 봉지에 부딪히면서 두어 번 왔다 갔다 했지만 난 그냥 입만 헤 벌리고 있었거든. 숙녀가 오락가락하는데 나 같은 남정네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단 말이지.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아주 살짝 못마땅했어나 보다. 엄마와 아빠, 꼬맹이, 그리고 나. 엘리베이터에 이렇게 넷이 들어와 섰다. 문이 닫히고 조금 있다가 아이는 갑자기 내 쪽으로 오더니 나를 탁 소리 나게 쳤다. 워낙 키가 작다 보니 내 주머니 부근을 쳤을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깜짝 놀라 '어!' 소리를 냈다. 나도 깜짝 놀랐다. 그래도 소리는 안 지르고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가 엄마 옆에서 웃고 있었다. 장난기 반, 수줍음 반. 그 웃음 때문에 난 사람으로 돌아왔다. 입을 다물고 눈을 뜨고 아이를 향해 웃으며 몇 마디 건넸다. 아이가 내릴 때는 '안녕' 하고 인사도 했다. 이상하게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아이들과 자주 엮인다.

3. 40, 50 그 어디쯤

마흔과 쉰 그 사이 어디쯤에서도 아이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대충 알고 있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충 알고 있을 땐 '그럴 수도 있지 뭐' 정도의 심정이지만 직접 보면 정말 끔찍하다.

by 지킬 | 2008/09/28 12:48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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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esism at 2008/09/29 10:02
지킬님이, 이상하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엮인다'기보다는 아이들에게 '먹히는' 스타일인가봐요. 아이들도 알아보는 거겠죠. 이렇게 아이들을 좋아하시는데 말여요. 알레르기성 비염 정말 괴롭죠. 저는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점점 증상이 완화되고 있어 다행이지만 그 괴로움은 안 겪어보곤 모르죠. 힘차게 이겨내세요! ^^
Commented by 지킬 at 2008/09/30 11:34
아이들도 저를 좋아해주면 좋죠~ 어쩌면 아이들과 자꾸 눈을 마주치려고 해서 그런지도 모르구요^^
비염은 고2때 즈음 첫 증상을 보이더니만 이제껏 달고 삽니다. 평균 2주에 한 번꼴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거 같고,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저를 완전히 사로잡는 듯해요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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