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09일
님은 먼 곳에, 관계와 존재
입으로 먹고 아래로 싸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라면 으레 억압과 구속이 뒤따른다. 자그마한 소규모 시스템이라면 그 굴레를 벗어 던지거나 헐겁게 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덩치가 커질수록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다 보니 한 국가, 한 전통 아래 모여 사는 구성원들은 그 압박과 구속에 나름 반응을 보이며 살아간다. 아예 의식을 못하는 자, 불합리를 느끼면서도 순응하는 자, 대놓고 거부하는 자... 예를 들자면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거다. 사람들 각자의 삶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할 테니까.여기 순이가 있다. 출발은 전통이 요구하는 여인상이다. 부모 의사에 따른 결혼을 했고, 죽어도 시댁 귀신이 되어야 하며,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 그러던 순이가 써니가 된다. 불가피한 변화였다고 하나 어쨌든 그 탓에 전통 관념의 굴레는 벗는다. 그러나 그녀는 대신 다른 하나의 굴레를 쓴다. 성적 이미지를 파는 여자. 돈과 남성이 조합해낸 구속인 것이다. 순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인다. 베트남에서 월맹군의 포로가 될 때도 그랬다. 그녀의 의사 따윈 상관없었다. 포로가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이 억압받는 상황. 순이는, 써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월맹군의 모습을 보면서, 극도의 무력함 속에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길은 한 집안의 장손이자 외아들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터라 전통에 얽매이진 않았겠으나 장손이란 그의 위치는 그를 손쉽게 살게 놔두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놔둔 채 의사와 상관없이 한 결혼, 군 입대, 사랑하는 이로부터 배달된 이별 편지. 상황은 상길을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내몬다. 그는 모든 게 불합리하다 여겼겠지만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베트남이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전쟁터라는 극한의 상황. 몰리다 몰리다 그는 끝까지 몰린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애증 얽힌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상길은 결국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 상길이 죽음 앞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려 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단순히 그것 때문이었을까?
전쟁터에 있는 또 하나의 인물, 정만. 얼핏 보면 그는 사회적 억압이나 구속과 무관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가 지닌 사고방식이 나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기에 억압이나 구속 안에서 도드라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그 굴레를 잘 이용하는 쪽이다. 순이를 써니로 바꾼 것도, 전쟁터에서 돈을 벌려는 것도, 이쪽저쪽 비위를 맞추며 목숨을 구걸한 것도 정만이다. 그의 삶은 무언가 빈 듯하지만 그 빈 자리를 돈이 메우고 있다. 그런데 정만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 목숨을 위협받는 구속을 경험한 후다. 근본적인 존재가 지워질 뻔한 위기 상황 속에서 그가 마주친 건 무엇이었을까?
순이는 남편 상길을 만나기 위해 전쟁터를 떠나길 거부하고, 상길은 그토록 밉던 선임병의 죽음에 정신을 놓아버린다. 정만은 돈을 불태우고 순이를 돕기 위해 미력하나마 몸을 던진다. 순이는 자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상길을 찾아야만 했다. 상길은 전쟁터 속 유일한 관계였던 선임병이 죽자 자신의 존재를 버리려 했다. 정만은 순이를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들이 억압과 구속의 굴레 안에서 버텨내기 위해 필요한 건 진정성이 내포된 관계였다. 그 가냘픈 관계마저 없다면 그들은 줄 끊어진 연처럼 영영 방황만 하다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제목 : 님은 먼 곳에(2008년)
감독 : 이준익
출연 : 수애(순이), 정진영(정만), 엄태웅(상길), 정경호(용득), 주진모(성찬), 신현탁(철식), 이주실(어머니), 박윤호(김상병), 조미령(제니),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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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8/09 15:49 | 영화...또다른 현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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