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15일
아프리카의 여왕, 삶을 사랑하다
난 당신을 모릅니다.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리는 거죠. 그 행위는 어쩌면 당신과 첫인사를 하는 걸 수도 있겠죠. 허나 그렇게 믿지 않겠습니다. 새벽닭의 울음이 어둠을 밀어내듯 내 울음소리도 당신을 밀어내는 거라 믿겠습니다. 난 지금 당신과 만나야 할 어떤 이유도 없으니까요.난 당신을 모릅니다. 두 발로 뛰어다니면서 많은 것들을 봤습니다. 이젠 무서운 것도 제법 생겼죠. 가끔 당신을 보기도 한 거 같습니다. 그래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슬프지도 않습니다. 아직 슬픔은 내 몫이 아니거든요. 난 세상을 더 뛰어 다닐 겁니다. 그러니 날 만나고 싶다면 그 꾸준한 걸음으로 부지런히 쫓아와야 할 거예요. 떠오르는 해님이 저 앞에 있네요. 해님을 향해 난 누구보다 빨리 뛸 수 있답니다.
난 당신을 모릅니다. 연약했던 두 발은 커질 대로 커져서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종종 방향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게 됩니다. 그럴 때면 가끔씩 당신이 내 주변을 기웃거리는 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무서울 법도 하건만, 당신을 알아줄 만도 하건만 난 그럴 수가 없습니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비추고 있거든요. 이 때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내 몫이고 슬픔과 아픔도 내 몫이죠. 미안하지만 당신이 끼어드는 걸 난 허락할 수가 없답니다.
난 당신을 알 것도 같습니다. 태양이 내 뒤로 살짝 넘어갔습니다. 당신은 영악하게도 뒤를 쫓는 걸 그만 두고 앞서 가고 있군요. 어두운 그 뒷모습과 보여주지 않는 얼굴. 그래요, 알겠어요. 이젠 당신이 아닌 내가 뒤를 쫓는 거겠죠. 내 열정도 예전 같지가 않아요. 그래도 착각하진 말아요. 난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나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아무리 무서운 당신이라 하더라도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내 앞에 길게 드리워진 당신을 보고 있으면 당신을 알만도 하건만 난 여전히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당신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또 무슨 까닭일까요? 더 이상 무섭지는 않네요. 처음부터 당신이 내 운명의 상대였기 때문에 그런가요? 대답해 줄 리 없겠죠. 당신이 날 쫓아다닐 때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화가 많이 났을 거예요. 그 때 얼굴이라도 좀 봐둘 걸. 어쨌든 당신 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예전 일도 그렇고, 지금도 당신이 화낼 일이 하나 더 남았거든요. 이 손 보여요? 앙증맞게 꼭 쥐고 있던 자그마한 손이 튼튼하고 굳센 손으로 자랐다가 지금은 온통 주름으로 자글거리죠. 누군가는 이 주름이 당신의 흔적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니에요. 이 주름은 바로 내 흔적이랍니다. 당신이 나를 결코 차지할 수 없었던 때에 내가 직접 남긴 내 가치. 노여워도 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게 내 매력이고 내 근원이니까요.
곧 해가 지면 밤이 오겠군요. 온통 어둠이 내려앉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보여주지 않을 심산인가요? 정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요. 그렇게까지 복수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너무 속단하진 마세요. 다가올 복수에 너무 기뻐하지도 말구요. 거대한 당신 품 안에 갇히게 될 내가 절대 지금의 나와 똑같을 리는 없으니까요.
- 삶의 나르시시즘
영화를 보면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삶이여, 다시.' 스토킹을 일삼는 죽음에 동정을 베풀 필요도, 연민을 품을 필요도 없다. 삶의 유일한 대응책은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것.
원제 : the African Queen(1951년)
감독 : 존 휴스턴
원작 : C.S. Forester 'the African Queen'
출연 : 험프리 보가트(찰리 올넛), 캐서린 헵번(로즈 세이어), 로버트 몰리, 피터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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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4/15 01:36 | 영화...또다른 현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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