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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 지켜낼 수 있을까?

 
사람은 공평해야 한다. 얼마 전 영화 글에서 KBS의 <대왕세종>을 끌어들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MBC의 <이산>을 잠깐 이용해 볼 생각이다. 두 주 전 방송 분량이었던가? 아들 사도 세자가 쓴 편지를 읽게 된 영조는 세손인 이산과 마주한다. 그 자리에서 영조는 세손에게 약속한다. '네 아비는 너를 지켜 달라 했다. 그것이 네 아비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 아이가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남겨 놓아 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내 너를 지켜줄 것이다. 왕위에 오르거라. 왕위에 올라 네 아비의 뜻대로 성군이 되거라.' 날짜가 꽤 지나서 대사 내용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용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영조는 약속대로 세손을 지켜냈고 세손은 왕위에 올라 정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미스트>에는 여러 판단과 행동들이 나온다.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용기 있는 행동을 보인 자는 데이빗이다. 이에 반해 카모디 부인은 공포와 구원을 미끼로 대중을 현혹하는데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말을 진실이라 믿기에 그녀의 선동은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변호사인 브렌트는 지나친 자신감과 고집으로 일관하고, 마트의 전기 기술자인 짐은 힘든 길에서 느낀 고통과 좌절로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한다. 이들 외에도 하나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이 꽤 많다. 그만큼 영화는 마트란 공간을 사람들이 일군 사회의 축소판으로 설정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게 되고 서로 다툼을 벌인다. 데이빗과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브렌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대립하고, 나중에는 카모디 부인에게 현혹된 사람들 틈에서 싸우게 된다. 그런 과정을 쭉 살피다 보면 영화는 한 가지 결론을 보는 이들에게 선사한다.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가장 올바르게 사람을 이끄는 캐릭터는 데이빗이라는 거. 그는 공포와 위협 앞에서 돌출되는 문제들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섣부른 타협이나 회피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제물로 삼거나 외면하지도 않는다. 데이빗은 그렇게 사람들을 이끌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던, 아들과 한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분명 내가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다. 시스템이라 해서 거창한 건 아니다. 글을 쓰는 방식, 글의 바탕이 되는 생각, 글을 이루는 단어들과 문체. 이런 것들이 현재 내가 구축한 시스템이다. 다행히도 이 시스템엔 강제성은 없다. 읽다가 싫으면 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끝까지 읽을 생각이라면 내가 적은 순서대로 읽을 수밖에 없다. <이산> 관련 약속 얘기를 하다가 <미스트>의 등장인물 유형을 설명하더니 이젠 이 블로그의 시스템 얘기다. 참 불친절하고 뜬금없다. 그래, 맞다. 시스템은 불친절하고,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면 정말 뜬금없이 보인다. 그런 게 시스템이다. <미스트>에서 사람들이 충돌하고 험악해지는 것은 바로 그 시스템 때문이다. 있는 듯 마는 듯 마을에 존재하는 군대라는 조직과 우연히 그 내부에서 발견된 차원의 문. 마을 사람들의 불운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며, 이 때 군대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시스템의 한 예가 된다. 확장이란 속성을 지닌 시스템은 확장에서 비롯될 위험 요소를 완전히 개인의 몫으로 둔다. 정보가 부족한 개인은 그 위험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직접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것은 거대한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미리 충분한 정보를 알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정보는 힘·권력과 비례한다. 아니, 어쩌면 동의어일 수도 있겠다. 힘이 있는 자는 많은 정보를 갖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훨씬 큰 게 요즘 세상이니까 말이다. <미스트>에서 데이빗의 실패는 정보가 부족해서였고 힘이 없어서였다. 그는 한 무리를 이끌었지만 그들 모두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자들은 아니었다. 반면 <이산>에서 영조는 시스템의 정점이었고 그 까닭에 세손을 지켜내는 게 가능했다. 시스템의 혜택을 받아 그 힘을 나눌 수 있다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어떤 결과에 도달하더라도 딱히 이상하지 않은 게 사람과 시스템의 관계인 것이다. 영웅? 그 휘황찬란한 이름 때문에 사람과 시스템의 관계를 손쉽게 깨뜨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말자. 시스템의 정점이었던 정조조차도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반대파 때문에 개혁을 후대까지 지속시키지 못했다. 하물며 데이빗이야 말해 무엇 할까. 폭풍우로 나무가 창문을 뚫고 들어올 때 집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영화 <미스트>의 시작은 영화 줄거리의 시발점이기도 하지만 딱 데이빗의 입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제 : the Mist(2007년)
감독 : 프랭크 다라본트
원작 : Stephen King 'the Mist'
출연 : 토마스 제인(데이빗 드레이튼), 로리 홀든(아만다), 마샤 게이 하든(카모디 부인), 윌리엄 새들러(짐), 토비 존스(올리), 나단 갬블(빌리 드레이튼), 샘 위트거(웨인), 안드레 브라우어(브렌트 노튼), 프란시스 스텐하겐, 제프리 드먼, 알렉사 다발로스(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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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킬 | 2008/02/10 10:18 | 영화...또다른 현실 | 트랙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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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 FILM ODYSSEY at 2009/01/29 15:40

제목 : [미스트] 그들은 왜 갇혀야만 했나
한 번 볼 때와 두 번 이상 볼 때의 느낌이 크게 다른 영화가 종종 있다. 케이블에서 다시 만난 가 꼭 그렇다. 뭐랄까. 슈퍼마켓에 갇힌 군상의 행태를 향했던 내 관심이 이번에는 그들이 거기 갇혔다는 상황 자체로 옮겨졌구나, 싶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얼마나 부조리한지에 관한 이 기가 막힌 플롯을 예전에는 왜 못 알아봤을까. 요컨대 여기에는 ‘사람 > 자연’이라는 공식의 완전한 ‘역전’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 < 자연.’ 지구라는 공간을.....more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8/02/11 19:28
역시나 남다른 시선으로 ~_~
(멋지세요~꺄악~)

결국 데이빗은 마지막에도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네요. ㅜ ㅡ
Commented by 지킬 at 2008/02/12 09:56
제 눈이 나이 든 동태 눈깔치곤 좀 반짝이긴 합니다--;
데이빗은 가질 수 없는 자들의 한계를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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