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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31일, 박탈감

 
지하철에 앉아서 발끝을 본다. 여느 때 같으면 책이라도 한 권 펼치고 읽었겠지만 심란한 마음 탓에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는 없다. 그래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시선은 아래로. 솔직히 귓구멍에서 울리는 음악도 어딘가로 줄줄 새어나간 지 오래다. 온 마음이 방향 잃은 생각으로 꽉 차 있는 판에 음악이 감히 어디를 비집고 들어오겠는가.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시야에 양말을 신은 내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잡혔다. 제대로 된 상황이라면 운동화 끝이 보여야 하겠지만 2주 전쯤 그 부위에 구멍이 뚫린 후로 양말 끝이 보인다. 돈이 없어서 신발을 안 산 것도 아니고, 다른 신발이 없어서 구멍 뚫린 운동화를 굳이 신고 나온 것도 아니다. 월초에 예상했던 지출에서 없던 부분이라 다음 달에 구입할 생각이었고, 하필이면 유독 이 신발이 가장 맘에 들어 다른 신발을 신고 싶지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지금 고개를 쳐든 내 엄지발가락과 나는 다른 때보다 더욱 가깝게, 한 꺼풀 벗겨낸 채 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안녕, 엄지야?' 아무 말이 없다. '삐졌구나?' 역시 침묵. 토라질 만도 했다. 하루 종일 내 몸을 맨 밑에서 버텨주는데 감싸주지 못할망정 시원한 겨울바람에 노출시켜놓았으니.

'너도 박탈감 같은 걸 느끼니? 수고하는 것에 비해 너무 받는 게 없어서?'

역시 대답이 없다. 제 녀석이 직접 말하기엔 조금 쑥스러울 수도 있겠다. 내가 서른 넘게 살았으면 발가락도 서른 넘게 살았을 텐데 그 나이에 박탈감 운운하기엔 조금 겸연쩍긴 할 거다.

지하철에서 내려 추운 밤거리로 나왔다. 잠깐 귓속을 파고들었던 음악 소리가 다시 사라지고 얼마 전 걸려왔던 몇 통의 전화가 떠오른다.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을 담은 이야기들.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끝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딱 하나였다. 그런데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요즘, 왜 이리 속이 허한지 모르겠다. 갑자기 축 쳐졌다가도 괜히 심통이 나서 증기 뿜는 물주전자처럼 요란스럽기도 하고. 박탈감 때문일까? '내 맘대로 살고 싶다아~'라는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걸까? 이거 참, 이 나이에 이 무슨 어리광인지...

2008년 1월

- 올해부터 삼재가 시작되는 거 아닌감? 정초부터 심상치 않아...
- 건강 검진을 받아볼까 고민 중. 하지만 위 내시경이 무서워 한 달 내내 벌벌.
- 어머니 살 빼는 문제 고민 중. 점점 체형이 곰돌이처럼 되어 가는데... 마늘을 드려야 하나?
- 새로운 진로 고민 중. 잘 풀리는 듯하다가 꽉 막힘.
- 너무 고민만 하는 거 같아 문득 '내 성격에 장애가 있나?'라는 고민(...)에 빠져봄.
- 좋은 일? 있었는데 고민거리가 항상 바로 꽁무니를 물고 들어와 잘 기억이 안 남.
- 1월 같은 상황으로 쭉 가면 올해도 살찔 염려는 없어 보임. 최소한 비만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먼.
- 2008년 1월의 단어 : 박탈감

by 지킬 | 2008/02/01 01:48 | 달력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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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2/01 02: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esism at 2008/02/01 13:02
박탈감을 느끼신 지킬님께 죄송하지만 저는 이 글 읽으면서 피식 피식 웃었어요. 저도 고민이 많은데 성격에 장애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추가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지킬 at 2008/02/02 01:25
비공개/ 제가 요즘 살짝 투정 부리는 분위기긴 합니다. 말없이 고요한 건 제 주특기 중 하나구요--;
어서 오세요. 새해 들어 여러 분들과 만나게 되는군요^^

sesism/ 웃으면서 읽어주시면 제가 글 쓰기가 더욱 편해져서 좋아요.
제가 고민을 옮게 한 건가요? 이거 고민이 또 하나 생겼는데요...;
Commented by 여우비 at 2008/02/03 09:16
음. 저도 죄송하지만 피식피식 웃으면서 봤어요, 하하. 저도 고민만 많은 성격이라, 저도 고민 추가;;; 지킬님의 고민을 하나 더 추가해드릴게요 으하하. 어머니 체형이 곰돌이가 되어가신다니, 왠지 귀여워요 히히.
Commented by 지킬 at 2008/02/04 10:59
고민하고 사는 분들 참 많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 체형은 소파에 앉아서 졸고 계실 때 보면 귀엽게 느껴질 때가 있긴 해요^^;
Commented by unique at 2008/02/05 08:57
어리광은 코흘리던 시절부터 벽에 똥칠하는 순간까지 간직해야할 소중한 뭐 그런 거 아닐까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8/02/06 09:47
그런 거라면 다행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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