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31일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이틀 동안 일곱 시간 정도의 잠, 새벽 6시 조금 넘어서 출발해 도로에서만 다섯 시간, 그리고 그 외에도 불편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뒤로 하고 전라남도 어느 곳, 집안 선산이 있는 곳에 서 있다. 그 곳엔 삶을 떠난 사람의 육체가 땅 밑에 묻혔고, 지금 막 또 한 명의 육체가 흙으로 덮이는 중이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제 죽음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접했을 저 어르신의 떠남을 나는 진심으로 슬퍼하기나 할까? 집안 어른의 부고를 듣고 장지까지 따라와 산 자들의 절차를 지켜보는 건 분명하지만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산 자가 지켜야 할 예의와 가까운 핏줄이 느낄 슬픔을 배려해서 함께 자리를 지키지만 정말 슬픈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함과, 겉과 속이 같지 않은 그 이중성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다. 마치 그런 것이 삶이라는 양 다소 불편한 심기를 감춘 채 그렇게 어정쩡하게.
하얀 나비가 눈앞을 가로질러 저만치 날아간다. 나비가 이 계절에도 날아다니던가? 모르겠구나. 아무렴 어떠랴. 파리도, 모기도 계절을 잊고 제 맘대로 휘젓는 판에 나비 쯤 대수일까. 나비는 검은 양복과 흰 상복을 입은 사람들 곁에서부터 내 시선에 들어오더니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 내 눈은 나비를 쫓는다. 맨 흙이 드러난 봉긋한 봉분, 흙먼지에 더럽혀지고 비에 씻겨져 얼룩진 비석, 시신을 싣고 와 이제 그 임무를 다한 후 불에 삼켜지는 중인 나무 관, 그 너머로 둥실 떠가는 흰 구름 드문드문 담고서 끝 간 데 모르게 뻗은 하늘. 저 곳엔 무엇이 있을까? 푸른 색 하늘 너머, 검은 우주 공간 속 심연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뭐.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희망을 끌어낸다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죽음과 닮아있는 것 중 하나는 하필이면 하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넓은지도,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며, 우리를 끌어당기면서도 막상 그 안에선 두렵게 만드는 공간. 사람들의 하찮음을 깨우쳐 주면서도 한편으론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함을 꿈꾸게 하는 창공. 난 그곳에서 당황스럽게도 나비를 놓쳐 버렸다. 눈동자가 방황한다. 무엇을 쫓아야 하나, 어디를 봐야 하나?
둘 곳 잃은 눈동자를 부여잡은 건 어디선가 등장한 검은 나비다. 하얀 나비가 사라진 그 방향에서 나타난 검은 나비는 하얀 나비의 궤적을 반대 방향으로 쫓았다. 관을 태우며 넘실대는 불, 비석을 옥죄이듯 주변을 둘러싼 풀들, 봉분을 뚫고 올라온 이름 모를 잡초, 다시 검은 양복과 흰 상복을 걸친 사람들. 생명이 떠난 새 육신을 차지한 묘 자리엔 어느 새 흙더미가 불룩하게 자리 잡았다. 태아를 품고서 만삭이 된 어머니의 배라도 된 듯 죽음이 그 새로운 시작을 뽐내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가 힘겹게 경사진 땅을 오르고 계신다. 아주 살짝 경사진 땅을 아주 힘겨워 하시면서. 사람의 욕심이란 누구나 다 같다. 내 어머니, 내 가족만큼은 오래토록 내 곁에 머물러 줬으면 싶다. 그래서 죽음이 삶을 비집고 들어온 묘지나 장례식장 같은 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상황은 은근히 불편하다. 하지만 노년이 되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을 수긍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어머니는 종종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곤 하신다. 언제나 자식 걱정과 함께. 돌아가고 싶구나, 집으로 빨리. 빌어먹을 대도시 서울이 그리울 줄이야.
하얀 나비가 눈앞을 가로질러 저만치 날아간다. 나비가 이 계절에도 날아다니던가? 모르겠구나. 아무렴 어떠랴. 파리도, 모기도 계절을 잊고 제 맘대로 휘젓는 판에 나비 쯤 대수일까. 나비는 검은 양복과 흰 상복을 입은 사람들 곁에서부터 내 시선에 들어오더니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 내 눈은 나비를 쫓는다. 맨 흙이 드러난 봉긋한 봉분, 흙먼지에 더럽혀지고 비에 씻겨져 얼룩진 비석, 시신을 싣고 와 이제 그 임무를 다한 후 불에 삼켜지는 중인 나무 관, 그 너머로 둥실 떠가는 흰 구름 드문드문 담고서 끝 간 데 모르게 뻗은 하늘. 저 곳엔 무엇이 있을까? 푸른 색 하늘 너머, 검은 우주 공간 속 심연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뭐.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희망을 끌어낸다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죽음과 닮아있는 것 중 하나는 하필이면 하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넓은지도,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며, 우리를 끌어당기면서도 막상 그 안에선 두렵게 만드는 공간. 사람들의 하찮음을 깨우쳐 주면서도 한편으론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함을 꿈꾸게 하는 창공. 난 그곳에서 당황스럽게도 나비를 놓쳐 버렸다. 눈동자가 방황한다. 무엇을 쫓아야 하나, 어디를 봐야 하나?
둘 곳 잃은 눈동자를 부여잡은 건 어디선가 등장한 검은 나비다. 하얀 나비가 사라진 그 방향에서 나타난 검은 나비는 하얀 나비의 궤적을 반대 방향으로 쫓았다. 관을 태우며 넘실대는 불, 비석을 옥죄이듯 주변을 둘러싼 풀들, 봉분을 뚫고 올라온 이름 모를 잡초, 다시 검은 양복과 흰 상복을 걸친 사람들. 생명이 떠난 새 육신을 차지한 묘 자리엔 어느 새 흙더미가 불룩하게 자리 잡았다. 태아를 품고서 만삭이 된 어머니의 배라도 된 듯 죽음이 그 새로운 시작을 뽐내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가 힘겹게 경사진 땅을 오르고 계신다. 아주 살짝 경사진 땅을 아주 힘겨워 하시면서. 사람의 욕심이란 누구나 다 같다. 내 어머니, 내 가족만큼은 오래토록 내 곁에 머물러 줬으면 싶다. 그래서 죽음이 삶을 비집고 들어온 묘지나 장례식장 같은 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상황은 은근히 불편하다. 하지만 노년이 되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을 수긍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어머니는 종종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곤 하신다. 언제나 자식 걱정과 함께. 돌아가고 싶구나, 집으로 빨리. 빌어먹을 대도시 서울이 그리울 줄이야.
# by | 2007/10/31 01:51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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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ism/ 부모님이 '떠남'을 얘기할 때면 그 분위기와 상관없이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요즘 잘 자고 있어요. 제가 단순한 면이 있어서 서울 올라오자마자 헤헤거리며 잘 지내는 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