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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잠깐 짬이 생겨서 밖으로 나왔다. 지나간 영화의 끝과 다가올 영화의 시작 사이. 30분쯤의 그 틈은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책은 읽기 싫고, 살짝 고픈 배를 채우러 편의점까지 가기도 귀찮고. 서성이는 마음처럼 발걸음도 이리 저리 오락가락하다 문득 시선이 하늘에 가 꽂혔다. 빨간 풍선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훨훨 어디로인가로. 별다른 표정 없이 풍선을 쫓다가 하늘을 쳐다봤던 것만큼이나 갑자기 사진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아까는 시선이 하늘에 가 꽂혔다면 이번엔 기억이 어둠에 가 꽂힌 셈이다. 그 곳엔 어린 시절 나를 찍은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자기 아이의 순간을 렌즈에 포착해내는 부모의 솜씨는 다 예술가의 솜씨라고 했던가? 어머니가 찍었던 그 사진에는 서너 살 무렵의 내가 담겨 있었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까봐 앞머리 한 움큼을 위로 잡아 올려 노란 고무줄로 질끈 묶어 놓아서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가슴께에 무언가 그려진 노란색 티셔츠를 입었고 바지는... 남색 멜빵 바지였나? 그건 확실치 않다. 하지만 동글동글 살이 찐 얼굴이란 건 확실하다. 그 시절의 난 아주 토실토실한 아이였다! 어쨌든 귀엽고(?) 토실토실한(!) 나는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웃음 띤 얼굴에 신기함과 반가움이 반쯤 섞인 표정을 실은 채 고함을 질렀다. 사진은 바로 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집 앞 골목길에서 뛰놀다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야, 비행기다' 쯤의 소리를 내지르며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저 멀리 풍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신기해하지도, 얼마 전 알았던 새로운 사실과 불현듯 마주쳤다 해서 반가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멀거니 쳐다볼 뿐이다. 깜짝 놀랄 일이 생겨도 그저 멀뚱히, 세상 누군가가 미친 소리를 지껄여대도 그냥 그러려니. 그렇게 대충 휩쓸리며 살아간다.

귀에 꽂아둔 이어폰에서 새로운 옛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리메이크 곡이다. 가수도 신인이 아닐까 싶은데 공교롭게도 처음 시작 부분을 듣고 있자니 혜은이의 목소리가 연상됐다. 참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이번 리메이크 곡은 그 때 그 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세월이 가면,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사그라진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의 숙명일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삶을 누리고 싶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렘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한 세상이 남아 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고 싶다. 그러니 이번 한가위에도 달을 보며 포효할 테다. 새똥을 이마빡에 맞는 한이 있더라도 자주 하늘을 쳐다보련다. 가끔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어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다 삿대질도 해... 볼까? 흠, 이건 아니구나. 그래도 난 이미 아이가 아니지만 아이처럼 살고 싶다. 삶에 휩쓸리지 않고 삶의 흐름이 되어 살고 싶다. 세월이 가도 지금 이 소망만큼은 잊지 말았으면 싶다. 앞으로 다시 찾아오지 않을 2007년 한가위, 잘들 보내시길.

by 지킬 | 2007/09/24 10:45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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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7/09/24 11:23
전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나질 않아요. 우울한 것들이 많아 부러 꽁꽁 숨겨두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당간 지킬님도 한가위 잘 보내세요. : )
Commented by 여리 at 2007/09/24 18:13
옛것에 대한 아련한 기억..
지금도, 예전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죠..
모두 추억이란 이름에 되새겨 볼 수록 바래지고 바래져... 아쉽지만요..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Commented by shuai at 2007/09/24 18:28
적어도 두 편의 영화와 함께 하는 추석 전날이로군요. 시내는 조용하고 어딘가 여유로운 서울의 모습입니다. 잠시의 틈이 흘러간 세월을 떠올리게 해주었군요. 시간이 흐르면 영화와 영화 사이 바라보았던 빨간풍선을 기억하게 될까요. 기록이 남아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즐거운 한가위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Commented by 김응일 at 2007/09/25 02:27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7/09/26 11:32
히치하이커/ 어쩌면 돌아볼 필요도 없이 지금 아주 만족스런 삶을 살고 계신지도. 남은 휴일 잘 보내세요^^

여리/ 기억들, 추억들. 아쉽고 되짚어보고 싶은 것들이 꽤 있어요. 한가위는 잘 보내셨나요?

shuai/ 말씀하신 대로 기록이 남아있으니 다시 기억하는 게 가능할 겁니다. 어쩌면 기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기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도 모르구요. 시내는 정말 한가해요. 평소 붐비던 지하철도 아무 곳이나 앉을 수 있을만큼 한산할 정도니까요.
한가위 잘 보내시길^^

김응일/ 예, 김응일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7/09/26 12:4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24016 에 의하면 다음 달 보름 부근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제일 가까워져서 올해 가장 큰 보름달을 볼 거라네요.
그 즈음에 어머니 모시고 산소 다녀오셔요.^^
Commented by 지킬 at 2007/09/27 12:00
정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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