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8월 20일
네이키드 런치, 중독과 구속
데이빗 크로넨버그 #5
생선회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두 번에 한 번 꼴로 횟집에서 잔을 기울이곤 했을 정도였다. 그의 취향은 단순히 동네 횟집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친구는 어느 날 더욱 신선한 맛을 구하기 위해 수산 시장에 갔고, 바로 눈앞에서 회를 떠 주는 곳에 앉아 있었다. 생선은 펄떡 펄떡 뛰었고, 그 위로 몇 번의 칼질이 오갔다. 그리고 희고 불그스름한 속살이 언제 요동쳤냐는 듯 다소곳이 접시에 놓인 채 그의 앞에 준비됐다. 친구는 그 날 아주 맛있게 그 회를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친구는 한동안 예전처럼 회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젓가락으로 회를 집을 때마다 생선의 눈이 그 속살에서 보였고, 젓가락 사이에서 회가 흔들릴 때마다 칼날이 몸을 가르던 순간 요동치던 생선의 몸부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지만 친구는 뇌리를 스치는 영상들 때문에 젓가락으로 회를 집은 자세 그대로 순간 몸이 굳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뜬금없는 잡설 같지만 사실 뜬금없기는 이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다. 'Naked Lunch' 영어 사전을 뒤져도 안 나오고, 영화를 봐도 달랑 한 번 단어 그대로만 등장할 뿐 어떤 보충 설명조차 없다. 영화 내용만 보고 그 뜻을 유추해내야 할 판인데 영화조차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정보의 바다, 문명의 크나크신 은혜인 인터넷을 뒤져 그 뜻을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다행히도 어렵지 않게 원작자(William S. Burroughs)가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단어 풀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뜻과 비슷한 경우가 내 주변에 있었고, 불행히도 나 역시 딱히 다른 상황이 아니란 걸 깨닫고 말았다. 어쨌든 주변에 있었던 비슷한 경우는 글 첫머리에 적어 놓았으니 'Naked Lunch'의 의미가 궁금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아님 직접적인 뜻풀이를 원한다면 그냥 인터넷을 검색하든가. 난 지금 심사가 살짝 뒤틀리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냥 내 얘기만 해야겠다.
난 '해충 구제원'이다. 그러니까 벌레를 잡는 게 내 일이다. 그럼 '벌레'란 도대체 무엇일까? 발이 네 개 이상 달리고 벽을 타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징그러우면서 더러운 그 무엇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정의가 철저하게 내 관점에서 내려졌다는 것 정도. 그러니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문제를 일으킨 관점을 약간만 누그러뜨리도록 하자. 어차피 이 세상도 사람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내 관점을 조금만 양보하면 벌레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살아있는 것엔 존재 의미가 있는 법이다. 세상에, 벌레에게도 존재 의미가 있다니!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벌레의 존재 의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벌레와 어깨동무할 생각은 없다. 그것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여전히 벌레니까. 어쨌든 벌레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얻어냈다. 존재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명확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런 것. 정의를 내리고 보니 그 의미와 어울리는 또 다른 게 떠올랐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세상 살아가면서 꼭꼭 숨겨두어야만 하는 내 내면, 내 본성 말이다. 이런! 그럼 내 안에 벌레가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데 이를 어쩐다. 내가 하필이면 벌레 잡는 사람이거든.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내면을 스스로 억누르고, 때론 말살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성을 수단으로 해서. 내가 노란 '벌레약'을 이용해서 벌레들을 잡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충 구제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나 넉넉하지 않은 게 노란 벌레약이다. 이성이란 것도 어차피 그런 거다. 사람이라면 다 지녔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정말 웃긴 건 이성이 내 감추어둔 내면을 깨닫게 하고 자극한다는 거다. 이성으로 억눌러둔 내면이 이성에 의해 촉발되어 터져 나오다니, 이거 환장할 노릇 아닌가! 벌레 잡자고 받은 약을 마약 대신 써서 뿅 가는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니미, 뭐 이런 X 같은 게 다 있는 거람.
그래서 얘긴데, 해충 구제원보단 아무래도 '작가'가 더 좋을 거 같다. 작가. 왠지 느낌도 고상하고, 그 기원도 해충 구제원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래된 직업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글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의 내면을 파헤치고 본성을 폭로할 수도 있다. 글만 제대로 쓸 줄 안다면 돈벌이는 물론 일부러 내 안에 자리 잡은 벌레를 죽일 필요도 없다. 그러니 글을 쓰는 거다.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을. 글쓰기 전용 타이프라이터를 하나 마련해서 서로 의사소통하듯 글을 쓰면 더욱 좋겠지. 때론 내가 글을 쓰고, 때론 타이프라이터가 나를 이끌어주고. 응?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생각하고 글을 쓰는 건 엄연히 나지 타이프라이터 따위가 아니잖아.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도구가 사람 대신 생각할 수는 없다, 절대로!
젠장,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건 다 그 '검은 고기' 때문이다. 브라질 수생 지네를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거 중독성이 상당하다. 그러고 보니 또 벌레군. 하! 벌레를 갈아 만들었으니 사람의 내면을 파괴해 만든 꼴인가? 뭐, 그건 잘 모르겠고... 분명한 사실은 노란 벌레약하곤 차원이 다르다는 거다. 결과물은 훨씬 차갑고 세련된 종류의 무엇이지만 그것이 나오기까지 과정은 끔찍하고 역겹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뭐랄까,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걸 넘어서서 내면을 분열시켜 현실 감각을 흔들어 놓는 거 같다. 노란 벌레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은 가루가 필요했던 것인데 이젠 영락없이 검은 가루에 붙들리고 말았다. 꼴좋네. 글은 타이프라이터에 사로잡히고, 내면은 검은 가루에 중독 되어 가고.
이쯤 되면 인정하긴 싫지만 되돌아갈 방법은 없는 듯하다. '중독'이란 단어가 괜히 중독이겠는가? 완전한 사육, 완벽한 구속. 중독은 완전하고 완벽하다. 문명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완벽하라. 자유로운 너의 정신과 다듬어지지 않은 너의 내면을 내게 의탁해 세상과 하나가 돼라. 그리하여 내게 구속되면 너는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세상이 말씀하시는 복음이다, 아멘. 중독과 구속이란 말이 거슬린다고?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내 소중한 전부를 걸고 저항해본 적도 있었다. 윌리엄 텔, 또는 빌헬름 텔 이야기, 아마 한 번 쯤은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지배자의 폭정에 저항하다 자기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쏘아 맞춰야만 했던 사람의 이야기다. 윌리엄 텔은 활을 쏴서 사과를 맞췄고, 나중엔 끔찍했던 지배자를 몰아낼 수 있었다. 저항하다가 시련을 겪었고, 그 시련을 이겨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전설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전설. 그에 반해 나는 현실이다. 뭐, 환각에 빠진 것도 같지만 어쨌든 살아있다. 살아 숨쉬는 내가 머리 위에 올려놓은 컵을, 사과를, 아니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머리 위에 놓인 그 무엇을 총으로 명중시킬 수 있을까? 난 지금 영원한 자유의 나라, 아넥시아로 간다. 내가 먼저 간다고 조바심 칠 거 없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간다고 흉볼 것도 없다. 인터넷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이미 반 넘어 나를 쫓아왔다. 당신도 이제 곧, 얼마 안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윌리엄 텔 놀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다지 재미는 없으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라.
원제 : Naked Lunch(1991년)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원작 : William S. Burroughs 'Naked Lunch'
출연 : 피터 웰러(빌 리), 주디 데이비스(조앤 프로스트/ 조앤 리), 이안 홀름(톰 프로스트), 줄리안 샌즈(이브 클로퀘트), 로이 샤이더(벤웨이), 모니크 머큐어(파델라), 니콜라스 캠벨(한크), 마이클 젤니커(마틴), 로버트 A. 실버만(한스), 조셉 스코렌(키키)
생선회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두 번에 한 번 꼴로 횟집에서 잔을 기울이곤 했을 정도였다. 그의 취향은 단순히 동네 횟집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친구는 어느 날 더욱 신선한 맛을 구하기 위해 수산 시장에 갔고, 바로 눈앞에서 회를 떠 주는 곳에 앉아 있었다. 생선은 펄떡 펄떡 뛰었고, 그 위로 몇 번의 칼질이 오갔다. 그리고 희고 불그스름한 속살이 언제 요동쳤냐는 듯 다소곳이 접시에 놓인 채 그의 앞에 준비됐다. 친구는 그 날 아주 맛있게 그 회를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친구는 한동안 예전처럼 회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젓가락으로 회를 집을 때마다 생선의 눈이 그 속살에서 보였고, 젓가락 사이에서 회가 흔들릴 때마다 칼날이 몸을 가르던 순간 요동치던 생선의 몸부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지만 친구는 뇌리를 스치는 영상들 때문에 젓가락으로 회를 집은 자세 그대로 순간 몸이 굳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뜬금없는 잡설 같지만 사실 뜬금없기는 이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다. 'Naked Lunch' 영어 사전을 뒤져도 안 나오고, 영화를 봐도 달랑 한 번 단어 그대로만 등장할 뿐 어떤 보충 설명조차 없다. 영화 내용만 보고 그 뜻을 유추해내야 할 판인데 영화조차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정보의 바다, 문명의 크나크신 은혜인 인터넷을 뒤져 그 뜻을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다행히도 어렵지 않게 원작자(William S. Burroughs)가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단어 풀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뜻과 비슷한 경우가 내 주변에 있었고, 불행히도 나 역시 딱히 다른 상황이 아니란 걸 깨닫고 말았다. 어쨌든 주변에 있었던 비슷한 경우는 글 첫머리에 적어 놓았으니 'Naked Lunch'의 의미가 궁금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아님 직접적인 뜻풀이를 원한다면 그냥 인터넷을 검색하든가. 난 지금 심사가 살짝 뒤틀리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냥 내 얘기만 해야겠다.
난 '해충 구제원'이다. 그러니까 벌레를 잡는 게 내 일이다. 그럼 '벌레'란 도대체 무엇일까? 발이 네 개 이상 달리고 벽을 타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징그러우면서 더러운 그 무엇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정의가 철저하게 내 관점에서 내려졌다는 것 정도. 그러니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문제를 일으킨 관점을 약간만 누그러뜨리도록 하자. 어차피 이 세상도 사람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내 관점을 조금만 양보하면 벌레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살아있는 것엔 존재 의미가 있는 법이다. 세상에, 벌레에게도 존재 의미가 있다니!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벌레의 존재 의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벌레와 어깨동무할 생각은 없다. 그것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여전히 벌레니까. 어쨌든 벌레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얻어냈다. 존재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명확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런 것. 정의를 내리고 보니 그 의미와 어울리는 또 다른 게 떠올랐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세상 살아가면서 꼭꼭 숨겨두어야만 하는 내 내면, 내 본성 말이다. 이런! 그럼 내 안에 벌레가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데 이를 어쩐다. 내가 하필이면 벌레 잡는 사람이거든.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내면을 스스로 억누르고, 때론 말살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성을 수단으로 해서. 내가 노란 '벌레약'을 이용해서 벌레들을 잡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충 구제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나 넉넉하지 않은 게 노란 벌레약이다. 이성이란 것도 어차피 그런 거다. 사람이라면 다 지녔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정말 웃긴 건 이성이 내 감추어둔 내면을 깨닫게 하고 자극한다는 거다. 이성으로 억눌러둔 내면이 이성에 의해 촉발되어 터져 나오다니, 이거 환장할 노릇 아닌가! 벌레 잡자고 받은 약을 마약 대신 써서 뿅 가는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니미, 뭐 이런 X 같은 게 다 있는 거람.
그래서 얘긴데, 해충 구제원보단 아무래도 '작가'가 더 좋을 거 같다. 작가. 왠지 느낌도 고상하고, 그 기원도 해충 구제원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래된 직업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글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의 내면을 파헤치고 본성을 폭로할 수도 있다. 글만 제대로 쓸 줄 안다면 돈벌이는 물론 일부러 내 안에 자리 잡은 벌레를 죽일 필요도 없다. 그러니 글을 쓰는 거다.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을. 글쓰기 전용 타이프라이터를 하나 마련해서 서로 의사소통하듯 글을 쓰면 더욱 좋겠지. 때론 내가 글을 쓰고, 때론 타이프라이터가 나를 이끌어주고. 응?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생각하고 글을 쓰는 건 엄연히 나지 타이프라이터 따위가 아니잖아.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도구가 사람 대신 생각할 수는 없다, 절대로!
젠장,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건 다 그 '검은 고기' 때문이다. 브라질 수생 지네를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거 중독성이 상당하다. 그러고 보니 또 벌레군. 하! 벌레를 갈아 만들었으니 사람의 내면을 파괴해 만든 꼴인가? 뭐, 그건 잘 모르겠고... 분명한 사실은 노란 벌레약하곤 차원이 다르다는 거다. 결과물은 훨씬 차갑고 세련된 종류의 무엇이지만 그것이 나오기까지 과정은 끔찍하고 역겹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뭐랄까,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걸 넘어서서 내면을 분열시켜 현실 감각을 흔들어 놓는 거 같다. 노란 벌레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은 가루가 필요했던 것인데 이젠 영락없이 검은 가루에 붙들리고 말았다. 꼴좋네. 글은 타이프라이터에 사로잡히고, 내면은 검은 가루에 중독 되어 가고.
이쯤 되면 인정하긴 싫지만 되돌아갈 방법은 없는 듯하다. '중독'이란 단어가 괜히 중독이겠는가? 완전한 사육, 완벽한 구속. 중독은 완전하고 완벽하다. 문명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완벽하라. 자유로운 너의 정신과 다듬어지지 않은 너의 내면을 내게 의탁해 세상과 하나가 돼라. 그리하여 내게 구속되면 너는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세상이 말씀하시는 복음이다, 아멘. 중독과 구속이란 말이 거슬린다고?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내 소중한 전부를 걸고 저항해본 적도 있었다. 윌리엄 텔, 또는 빌헬름 텔 이야기, 아마 한 번 쯤은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지배자의 폭정에 저항하다 자기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쏘아 맞춰야만 했던 사람의 이야기다. 윌리엄 텔은 활을 쏴서 사과를 맞췄고, 나중엔 끔찍했던 지배자를 몰아낼 수 있었다. 저항하다가 시련을 겪었고, 그 시련을 이겨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전설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전설. 그에 반해 나는 현실이다. 뭐, 환각에 빠진 것도 같지만 어쨌든 살아있다. 살아 숨쉬는 내가 머리 위에 올려놓은 컵을, 사과를, 아니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머리 위에 놓인 그 무엇을 총으로 명중시킬 수 있을까? 난 지금 영원한 자유의 나라, 아넥시아로 간다. 내가 먼저 간다고 조바심 칠 거 없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간다고 흉볼 것도 없다. 인터넷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이미 반 넘어 나를 쫓아왔다. 당신도 이제 곧, 얼마 안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윌리엄 텔 놀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다지 재미는 없으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라.
원제 : Naked Lunch(1991년)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원작 : William S. Burroughs 'Naked Lunch'
출연 : 피터 웰러(빌 리), 주디 데이비스(조앤 프로스트/ 조앤 리), 이안 홀름(톰 프로스트), 줄리안 샌즈(이브 클로퀘트), 로이 샤이더(벤웨이), 모니크 머큐어(파델라), 니콜라스 캠벨(한크), 마이클 젤니커(마틴), 로버트 A. 실버만(한스), 조셉 스코렌(키키)
# by | 2007/08/20 11:05 | 영화...또다른 현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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