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8월 19일
사라진 자들(8/8)
8.
너무 엄청난 싸움을 벌였던 탓일까? 한바탕 불길에 휩쓸리고 난 뒤 잿더미 밖에 남지 않은 폐허처럼 마음이 공허해졌다. 절대 만족을 모를 것 같던 욕망마저도 잠깐 고개를 수그렸다. 왜일까, 지금 이 삶이 갑자기 의미 없이 느껴지는 건? 분명 구시대에서 흘러온 구태의연한 인간의 껍데기를 제대로 벗지 못해서일 것이다. 거대한 업적을 이루고 난 후의 상실감? 정상에 오른 뒤 찾아드는 무기력증? 모두 다 웃기는 얘기다. 난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무엇이 업적이고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 오만한 인간의 껍데기는 진작 벗겨 내버렸단 말이다! 갑자기 나 스스로가 역겨워졌다.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신경쇠약 증세에 빠진 환자처럼 주변을 둘러보던 난 알 수 없는 어떤 충동에 의해 내 팔뚝을 꽉 깨물었다. 나를 움직이던 기존의 욕망이 아닌, 다른 그 어떤 충동이었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존재의 새로운 진화 방향일까? 욕망의 앞잡이로 전락한 이성을 대신할 새로운 이성이라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그게 어떤 방향성을 갖든 내겐 큰 의미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활보하는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없었다. 내가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기껏 물어뜯는 일이었다니, 이런.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자 해가 뒷산 머리에 머무르며 잠시 세상을 굽어보는 중이었다. 황혼의 색이었다.
'잘 어울려.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야.'
엘리베이터를 탔다. 잠시 고민했다. 집에 들어가서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을 것인가, 그냥 12층으로 갈 것인가.
'첫 데이트에 검은 양복이라니. 아무래도 이 차림새가 더 낳겠어. 격렬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옷이기도 하잖아.'
1203호. 문은 열려 있었지만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집은 아주 깔끔했다. 이 여자는 어디서, 어떻게 욕망에 완전히 먹히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해서 욕망을 즐기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을까? 궁금한 게 많았다. 여자가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 물어보면 대답은 해 줄까? 아니, 과연 돌아오기나 할까?
거실 베란다 창문을 통해서 서울의 전경이 보였다. 빌딩뿐인 멋대가리 없고 단조로운 대도시의 풍경. 오늘 내겐 더 이상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사치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지는 해를 보며 기다릴까?'
바깥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을 지우고 그 소리에 집중했다. 어쩌면 이제 저 문명의 소리를 듣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1층에서 잠깐 멈춘 듯했던 엘리베이터는 특유의 동작음을 내면서 다시 움직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풀이 죽었던 욕망이 또 한 번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려움도 함께. 땡.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깐 정적.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맨발이었고 블라우스 윗부분이 조금 찢겨졌으며 머리가 좀 흐트러져 있었다. 그 밖엔 처음 마주쳤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여자는 들고 있던 칼을 소파 위로 던졌다. 그리곤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엉망이네."
"빌어먹을 세상과 아주 제대로 한 판 붙고 왔거든."
여자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찾아들다 사라졌다. 집적거리는 남자의 객기를 금방이라도 얼게 만들 차가운 미소였다.
"난, 별로였어."
"사람이 세상을 만들어간다고 생각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일 거야. 세상이 사람을 선택하고 만들어 가지."
"난 선택받지 못했단 얘기야?"
"운이 없었단 얘기지."
여자는 내 옆에 와서 서더니 바깥을 내다봤다. 그리고 혐오스럽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다들 멍청이 같았어. 생각이란 건 애초부터 할 줄 몰랐다는 존재들처럼. 사람들 몸에 생각을 없애 버리는 유해 물질이 들어있기라도 한 거야?"
"글쎄..."
그거야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멍청이든 아니든, 유해 물질이 있든 없든 누구나 똑같은 결말을 보게 될 거라는 점. 멍청이는 멍청이대로 멍청한 짓을 하고 똑똑한 놈은 똑똑한 대로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다. 아니, 내가 똑똑하다고 누가 그러던가? 내가 어디 생각할 줄 몰라서 지금 이런 선택을 한 것이냔 말이다.
"우린 꽉 막힌 데다 오만해."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자는 마치 그런 얘기를 할 줄 알았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멍청하긴."
나와 여자는 웃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웃을 만도 했는데. 여자가 아쉽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해가 안 보이네."
"우리, 나갈까?"
"참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 눈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처음 만날 때와 달리 나름 소란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던 것은 날뛰는 욕망을 어떻게든 억눌러 보려는 의도였었다. 나도, 여자도 그 점은 분명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죽음이 그렇게 두렵다니!
여자는 몸을 돌려 걸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소파 위에 놓인 칼을 보자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저 칼로 이 끔찍한 욕망을 끊어낼 수 있을까? 저 칼로 여자를 죽이고 그 후에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질문에 답을 하는데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난 이미 현관문을 열고 나간 여자 뒤를 얼른 쫓았다. 여자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칼을 가지고 나왔어?"
"아니."
여자는 내가 무엇 때문에 망설였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단 얘기가 되는데...
"입을 봤어. 내가 죽여서 쓰러뜨린 자였는데, 분명 숨이 끊어진 자였는데... 입은 계속해서 움직였어. 아직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 같았어. 몇 명만 그러려니 했는데 살펴보니 모두가 다 그랬어. 그 자들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지더라고. 내가 죽은 후 모습이.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칼로 날 찔러서 죽어버릴까?"
여자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여자도, 나도 어쩌면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처음 우리는 얼마나 오만한 존재들이었던가?! 여자는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고 안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있더니 내가 들어오고 나서야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버튼을 누르러 팔을 앞으로 뻗을 때 여자의 시선이 팔뚝에 난 이빨 자국에 가 닿는 걸 알았다. 난 팔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먼저 잠깐 실례 좀 했어. 먹으려 했던 건 아니고."
"자위라도 할 생각이었어?"
"응?"
무심결에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도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고 두 개의 욕망이 서로 통하고 말았다. 이젠 참아낼 길이 없었다. 키스부터 해야 하겠지? 일단은 하던 대로 몸이 반응했다. 나와 여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키스했다. 몸이 떨려왔다. 여자도 떨고 있었다. 욕망 때문인지, 이성이 부여잡은 두려움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여간 우린 떨면서 키스를 했고 그 후엔 서로의 이빨을 드러냈다. 100년 쯤 지난 뒤 어떤 외계 생물체가 지구에 도착한다면, 그 때 우리들의 흔적은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배고픔을 채우는 쾌감과 고통이 동시에 엄습해 왔다. 나는 이렇게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하지만 이 위치에선 해가 아직 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를 볼 수가 없었다. 시야 전체를 가리고 있는 건 입구 정면에 위치한 지하 주차장 입구였다.
- 끝 -
# by | 2007/08/19 00:27 | 지킬&하이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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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달력을 보니 이번주가 꼬박 채워져있네요. 열심히 연재하신 덕도 있고.. 아무튼 달려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내일 하루 남은 주말 편히 쉬세요^^ 시원~하게~~
저는 영화 두어 편 보고 팥빙수를 곁들여 주말을 잘 보냈어요. 시진이님도 주말 잘 보내셨길 바랍니다.
팥빙수, 맛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