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잊지 말고 기억하라 영화...또다른 현실

87년이었던가, 88년이었던가? 두 분 모두 전라도 분이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하셨다. 광주에서 시민들을 빨갱이라며 총 쏘아 죽인 게 전두환이다, 아니다 박정희다. 한참을 옆에서 듣다가 가만히 내 방으로 와서 백과사전을 뒤졌더랬다. '광주', '전두환', '박정희', '오일팔'. 그 단어들을 중심으로 사전을 찾았지만 비슷한 내용이라곤 없었다. 어머니는 누가 맞느냐며 내게 도움을 청하셨고 난 머리만 긁적였다. 그 때가 90년대도 아닌 80년대였다.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던 해가 포함된 80년대. 사람들은 그렇게 잊어가는 중이었고, 새로운 세대들은 아예 무슨 소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광주에서 일이 벌어진지 채 10년도 안 지난 그 때에.

<화려한 휴가>는 1980년에 일어났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다. 80년의 그 시절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던 일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던가. 하지만 불행히도, 이름을 얻는 대신 그 실체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기억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 점만으로도 의미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는 딱 거기까지가 한계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휴가>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다. 실화 그 자체가 아니라 허구가 삽입된 현실이다(또는 현실이 삽입된 허구). 그렇기 때문에 배우가 필요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줄 역할이 필요하다. 더구나 철저한 사명감에 불타올라 흥행을 무시하지 않는 한 영화는 사건을 주인공으로 해서 모든 캐릭터를 동등하게 다룰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개인을 부각시키는 것. <화려한 휴가>도 그 방법을 따른다. 전역한 군인 박흥수는 택시 기사 민우가 일하는 택시 회사 사장이고, 간호원 신애의 아버지이며, 시민군 조직에 앞장서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다. 그를 영웅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는 당시 광주에서 무르익었던 사람들의 열망과 입장을 포괄적으로 상징하는 인물이다. 반대로 계엄군 측 책임자 한 명은 개인의 명예와 출세에 집착하는 인물로 표현되는데 그는 권력을 향해 달려드는 당시 신군부 세력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이처럼 80년 5월 이전의 상황들이 개인으로 치환되면서 영화는 상업 영화로서 적절한 구조를 갖추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영화의 적절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정치·사회적 상황을 개인으로 치환시킨 데다 주인공인 민우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사연들이 슬픔으로 얼룩지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인물과 그들의 감정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이면서도 그 사건이 이 땅에서 지니는 정치·사회적 의미는 크게 눈에 띄질 않는다. 다시 말해 <화려한 휴가>는 광주 민주화 운동보다는 그 사건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다룬 영화이고, 정치적인 영화이기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슬픔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고, 우리 역사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되고야 만다.

지금껏 적어왔듯이 <화려한 휴가>는 의미 있지만 만만치 않은 문제점 또한 지닌 영화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같은 영화의 입장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결혼사진 속 인물들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웃고 있다. 웃지 않는 사람은 그 끔찍했던 5월의 광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다. 영화는 말한다. 그 때의 고통과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며, 그 때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 때의 고통과 슬픔이 살아남은 바로 그 사람만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때 일어난 비극은 어느 개인, 어떤 지역의 비극이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제목 : 화려한 휴가(2007년)
감독 : 김지훈
출연 : 김상경(민우), 안성기(박흥수), 이요원(신애), 이준기(진우), 박철민(인봉), 박원상(용대), 송재호, 손병호, 나문희


덧글

  • egoing 2007/08/02 10:14 # 삭제 답글

    분노가 슬픔에 자리를 내어준 것은 박제가 된 현실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 지킬 2007/08/02 11:39 # 답글

    슬픔마저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문득 오싹해집니다.
  • 히치하이커 2007/08/02 20:50 # 답글

    개본 전부터 굳이 이 영화는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그네들의 발언들이 착잡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만들어졌단 것만도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지만요.
  • 지킬 2007/08/03 11:34 # 답글

    이미 그런 말들을 했었군요. 당분간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더욱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겠죠.
  • 까만거북이 2007/08/09 13:42 # 삭제 답글

    감상문 잘 보았습니다..
    마지막 문단이 특히 인상깊네요..
    부족하지만 제가 끄적거린 글도 트랙백 걸고 갑니다..:)
  • 지킬 2007/08/10 11:30 # 답글

    어쩌면 제가 써놓은 마지막 문단이 영화의 가장 큰 의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제 컴퓨터 사정 때문에 까만거북이님 블로그에서 글을 읽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군요. 어찌 어찌 해서 트랙백은 보냈는데 글을 좀 읽어볼라치면 계속 티스토리 로그인 화면으로 넘어가버려서요--; 조만간 다시 차분하게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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