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하드 4.0, 존 맥클레인은 존 맥클레인이다 영화...또다른 현실

루시는 아빠가 못마땅하다. 엄마와 이혼을 했고, 한때는 술에 빠져 있었으며,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일 때문에 바쁘다. 경찰 일이란 게 맘 편하게 가족을 챙길 만한 여유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루시가 얘기하고 싶을 땐 아빠가 없고, 아빠가 대화를 청해올 땐 루시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 날도 그랬다. 아빠의 접근은 감시와 간섭처럼 느껴졌고, 그런 지나친 구속이 싫었던 루시는 아빠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루시 제네로에요." 제네로는 아빠가 아닌 엄마의 성이다.

매트는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내는 해커다. FBI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을 만큼 그의 솜씨는 만만찮다. 시스템의 취약 부분을 파고 들어가 시스템을 해체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해커로서 그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자유이자 즐거움이다. 그래서 매트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건넨다. 보수를 받고 한 일이기도 하지만 꽉 짜인 체계를 부순다는 쾌감 역시 그 작업의 주된 동기였으리라. 그런데 그가 만든 프로그램이 국가 시스템을 전복시킨다는 '파이어 세일'이란 디지털 테러의 한 부분으로 현실화되고 만다. 그저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재미와 거리가 멀었다.

토마스 가브리엘은 국가 기관에서 일하게 되자마자 전산 시스템의 취약점을 지적하고 디지털 테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하지만 그의 경고는 무시되고, 실제로 일부 시스템을 다운시켰던 그의 행동이 지나쳤단 이유로 직장에서도 해고된다. 앙심을 품은 그는 디지털 테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이란 국가를 상대로 디지털 테러를 가한다.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고 자유를 빼앗은 꼴이랄까.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돈이기 때문에 수단의 옳고 그름 같은 건 토마스에게 일차적인 고려 대상이 되진 않는다.

<다이하드 4.0>은 디지털 테러에 온몸으로 맞서는, 억세게 재수 없는 사나이 존 맥클레인의 얘기다. 80년대 후반인지 90년대 초반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나는 까마득한 먼 옛날에 첫 선을 보였던 그가 드디어 2007년에 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변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 때와 다름없이 단순 명쾌한 걸 좋아하고, 온몸을 내던져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며, 찰거머리에 억세게 재수 없이 테러리스트와 엮이는 사나이 그대로다. 그런 그가 디지털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10년 전 쯤인 3편에서만 해도 테러리스트가 제시한 문제를 놓고 파트너와 다툴 정도는 되었지만 이번 4편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존 맥클레인은 핸드폰으로 전화나 걸고 자동차 시동을 걸기 위해 전선이나 까뒤집는, 딱 고만큼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에 걸쳐 일어난 세 번의 커다란 사건 때문인지 존은 분명히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존은 자신이 영웅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오만해졌다고? 아니, 그건 아니다. 그의 자처는 오만에서 비롯됐다기 보단 명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그 일을 했을 뿐이란다. 존이 생각하는 영웅의 정의다. 거기에 그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영웅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필요에 의해 선택되고 서서히 잊혀지는, 심지어 필요에 의해 망각되기도 하는 영웅이란 자리를 분명히 깨닫고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3편 이후 12년이 지나서 화려한 귀환을 꾀하는 이 마당에.

4편에서 새롭게 등장한 존의 주변인물들이 모두 어떤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꿈꾸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존의 자각은 어쩌면 자기 역시 벗어던지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영웅이란 이름을 떨쳐버리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 퇴물 영웅 노릇은 4편에서 멈추고 싶다는 소망. 딸 루시의 입에서 '오늘은 맥클레인이야'라는 말보다 '난 맥클레인이야'라는 말을 듣고 싶은 소망. 과연 그는 그 소망들을 이룰 수 있을까? 루시는 아빠의 성을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둘러싼 가족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매트는 재미 삼아 자유를 누리려 했지만 책임 없는 자유는 끔찍하단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존은? 그가 어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도망친다는 게 상상이나 될 법한 일인가? 게다가 토마스처럼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든 말든 제 맘대로 설치는 인물을 그가 좋아할 것 같은가? 내 생각엔 이 막무가내 아저씨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천생 존 맥클레인은 존 맥클레인이다. <다이하드> 시리즈가 여기서 끝이 날 순 있겠지만 존 맥클레인으로 대변되는 영웅의 운명은 언제나 쓸쓸히 황야로 떠나는 서부극 총잡이의 운명 그대로일 것이다.


원제 : Live Free or Die Hard(2007년)
감독 : 렌 와이즈먼
출연 : 브루스 윌리스(존 맥클레인), 티모시 올리펀트(토마스 가브리엘), 저스틴 롱(매트 파렐), 매기 큐(메이 린), 클리프 커티스(바우먼),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루시 맥클레인), 조나단 사도우스키(트레이), 케빈 스미스(마법사), 매트 올리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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