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2월 04일
바람의 열두 방향 II
원제 : the Wind's Twelve Quarters
지은이 :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 Guin)
물건들(Things)
욕망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어떤 이의 소유물은 그 사람의 색깔을 보여준다. 취향은 물론이거니와 성격, 심지어는 인생관까지 엿보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관계라는 것도 서로에 대한 교집합을 찾는다는 점에서 소유라는 단어를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진정 한 단계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분명 모범답안은 있다. 그 때까지의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곧 그 때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정반합에 충실한 과정을 따른다면 확실히 더 나은 삶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답을 몰라서 어려운 게 삶이기도 하지만 답을 알아도 그대로 할 수 없는 게, 그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기도 하다. 버릴 것인가, 아니면 버리지 않고서 자신의 색깔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단, 그로 인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머리로의 여행(a Trip to the Head)
제목의 의미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무래도 단순히 우리의 생각을 의미하는 '머리'가 아닌, 근본적인 개념 또는 편견 없는 생각을 의미하는 '머리'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나무와 숲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연결지어 볼 때 그런 추측이 들어맞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긴 하지만 그건 이래저래 별 상관없는 문제. 두 명의 인물이 나온다. 과거에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와 같은 상태. 이름도, 고향도, 하던 일도 기억을 못한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몰두한다. 이름을 떠올리고 행적을 쥐어짜내고 살던 곳을 기억해내고. 하지만 잘못된 기억들이다. 번번이 틀리면서도, 그 대가로 혼자가 되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언제나 숲을 벗어나려 한다. 그런 그에게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사내'라는 것. 이름조차, 정체성조차 찾아내지 못했음에도 '사내'임은 분명하다. 인간이란 존재보다 남자란 존재에 집착하는 생물체. 그런 생물체가 바로 남자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Vaster than Empires and More Slow)
이 지구의 크기를 실감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우주의 크기는? 기껏해야 1m 남짓의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존재가 지구나 우주의 크기를 실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너무나 커다란 존재라서, 쉽게 수용 가능한 크기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외로움이라면? 말도 안 된다고? 내 주변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 말이 안 될 수도 있겠다. 아리따운 미소와 화기애애한 그 대화들 어느 구석에 외로움이 파고들 수 있을라고. 하지만 장담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우린 그 따뜻하다는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동반한 외로움을 쉽게 깨닫고 인정할 리는 없다. 깨닫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 후 덮쳐올 공포를 이겨낸다면 이해와 소통의 길이 열리고 그 길을 통해 진정한 '함께'가 되어 가겠지만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로움에 대한 인식은 누구에게나 낯설 뿐이다. 이해와 소통, 그리고 포용에 관한 이야기.
땅속의 별들(the Stars Below)
또 다른 세계, 그리고 없을 듯하지만 존재하는 진리 또는 섭리. 이 이야기는 진리를 좇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좌절되고 묵살당한 채 내부로 돌려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곳에서 새로운 세상과 진리를 찾아내고 더욱 몰입해간다는 점에서 이 단편은 자폐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시야(the Field of Vision)
오감 중 시각에 가장 큰 의존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둠은 공포다. 눈동자를 돌려도,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 뿐. 그럴 때 나머지 감각은 오히려 정상적 사고에 장애가 되며 공포를 더욱 키워가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만약에 그 반대라면 어떨까? 숨을 곳 없는 명백함, 거칠 것 없는 광활함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시선이 닿는 그 어디에도 거치적거릴 존재 없는 무한한 평야가 펼쳐진다면? 그 거침없는 무한함에 경이로움을 느끼기 전에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험난하리란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통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그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모르긴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진리가 일상이 되어 거대한 무미건조함으로 개인들을 덮쳐올 때, 마치 전체주의의 강령과 같은 진리에 함몰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두가 신의 가면을 뒤집어 쓴 그 세상. 외로움을 느낄 여지조차 없는 그 세상이 진정한 천국일까?
길의 방향(Direction of the Road)
우리들은 언제부터 서로를 바라보는 걸 그만 두었을까? 언제부터 상대방을 배려하는 걸 잊었을까? 상대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이 단편은 아주 유별난 장르 소설인 동시에 사람들의 외로움을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쳐다보지 않고 배려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들. 그들은 평소엔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이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은 일상이 깨어졌을 때, 즉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사물의 법칙(예를 들면 길의 방향이 완전히 어긋났을 때)이 깨어졌을 때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순간마저 그들의 시선은 상대방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자신이 만든 법칙에서 벗어난 그들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희생'과 '제물'을 구분하지 않는 세상. '제물'을 '희생'으로 미화시켜 외면하는 세상. 다수를 위해 소수를 억압하고 제물로 삼는,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기 쉽다.
혁명 전날(the Day Before the Revolution)
뜻을 같이 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 만들고 싶었던 세상. 그런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진 세상에서 이젠 모두 떠나버린 예전 그 사람들 대신 그들을 잇는 젊은 세대들이 혁명을 꿈꾸고 있다. 그들 속에서, 그 젊은 꿈속에서 이제는 나이 들어 홀로 남은 혁명가가 세상이 아닌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세대를 거쳐 이어지며 시간을 극복해나가는 정신과 서서히 허물어지며 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육체, 그리고 문득 그 둘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깨닫게 된 혁명가의 독백이 펼쳐진다. 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너무 '외로움'에 집착하는 듯하지만 이 마지막 단편에서도 난 여전히 그 단어를 놓지 못한다.
다 읽었다. 아니, 다 생각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또 다른 흔적들이 들고 일어나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한다. 이젠 자고 있는 다른 책들을 깨워야겠다. 우선은 커다란 침대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저 조그만 녀석부터.
지은이 :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 Guin)
물건들(Things)욕망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어떤 이의 소유물은 그 사람의 색깔을 보여준다. 취향은 물론이거니와 성격, 심지어는 인생관까지 엿보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관계라는 것도 서로에 대한 교집합을 찾는다는 점에서 소유라는 단어를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진정 한 단계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분명 모범답안은 있다. 그 때까지의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곧 그 때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정반합에 충실한 과정을 따른다면 확실히 더 나은 삶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답을 몰라서 어려운 게 삶이기도 하지만 답을 알아도 그대로 할 수 없는 게, 그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기도 하다. 버릴 것인가, 아니면 버리지 않고서 자신의 색깔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단, 그로 인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머리로의 여행(a Trip to the Head)
제목의 의미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무래도 단순히 우리의 생각을 의미하는 '머리'가 아닌, 근본적인 개념 또는 편견 없는 생각을 의미하는 '머리'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나무와 숲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연결지어 볼 때 그런 추측이 들어맞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긴 하지만 그건 이래저래 별 상관없는 문제. 두 명의 인물이 나온다. 과거에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와 같은 상태. 이름도, 고향도, 하던 일도 기억을 못한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몰두한다. 이름을 떠올리고 행적을 쥐어짜내고 살던 곳을 기억해내고. 하지만 잘못된 기억들이다. 번번이 틀리면서도, 그 대가로 혼자가 되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언제나 숲을 벗어나려 한다. 그런 그에게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사내'라는 것. 이름조차, 정체성조차 찾아내지 못했음에도 '사내'임은 분명하다. 인간이란 존재보다 남자란 존재에 집착하는 생물체. 그런 생물체가 바로 남자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Vaster than Empires and More Slow)
이 지구의 크기를 실감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우주의 크기는? 기껏해야 1m 남짓의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존재가 지구나 우주의 크기를 실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너무나 커다란 존재라서, 쉽게 수용 가능한 크기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외로움이라면? 말도 안 된다고? 내 주변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 말이 안 될 수도 있겠다. 아리따운 미소와 화기애애한 그 대화들 어느 구석에 외로움이 파고들 수 있을라고. 하지만 장담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우린 그 따뜻하다는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동반한 외로움을 쉽게 깨닫고 인정할 리는 없다. 깨닫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 후 덮쳐올 공포를 이겨낸다면 이해와 소통의 길이 열리고 그 길을 통해 진정한 '함께'가 되어 가겠지만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로움에 대한 인식은 누구에게나 낯설 뿐이다. 이해와 소통, 그리고 포용에 관한 이야기.
땅속의 별들(the Stars Below)
또 다른 세계, 그리고 없을 듯하지만 존재하는 진리 또는 섭리. 이 이야기는 진리를 좇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좌절되고 묵살당한 채 내부로 돌려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곳에서 새로운 세상과 진리를 찾아내고 더욱 몰입해간다는 점에서 이 단편은 자폐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시야(the Field of Vision)
오감 중 시각에 가장 큰 의존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둠은 공포다. 눈동자를 돌려도,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 뿐. 그럴 때 나머지 감각은 오히려 정상적 사고에 장애가 되며 공포를 더욱 키워가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만약에 그 반대라면 어떨까? 숨을 곳 없는 명백함, 거칠 것 없는 광활함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시선이 닿는 그 어디에도 거치적거릴 존재 없는 무한한 평야가 펼쳐진다면? 그 거침없는 무한함에 경이로움을 느끼기 전에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험난하리란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통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그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모르긴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진리가 일상이 되어 거대한 무미건조함으로 개인들을 덮쳐올 때, 마치 전체주의의 강령과 같은 진리에 함몰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두가 신의 가면을 뒤집어 쓴 그 세상. 외로움을 느낄 여지조차 없는 그 세상이 진정한 천국일까?
길의 방향(Direction of the Road)
우리들은 언제부터 서로를 바라보는 걸 그만 두었을까? 언제부터 상대방을 배려하는 걸 잊었을까? 상대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이 단편은 아주 유별난 장르 소설인 동시에 사람들의 외로움을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쳐다보지 않고 배려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들. 그들은 평소엔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이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은 일상이 깨어졌을 때, 즉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사물의 법칙(예를 들면 길의 방향이 완전히 어긋났을 때)이 깨어졌을 때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순간마저 그들의 시선은 상대방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자신이 만든 법칙에서 벗어난 그들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희생'과 '제물'을 구분하지 않는 세상. '제물'을 '희생'으로 미화시켜 외면하는 세상. 다수를 위해 소수를 억압하고 제물로 삼는,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기 쉽다.
혁명 전날(the Day Before the Revolution)
뜻을 같이 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 만들고 싶었던 세상. 그런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진 세상에서 이젠 모두 떠나버린 예전 그 사람들 대신 그들을 잇는 젊은 세대들이 혁명을 꿈꾸고 있다. 그들 속에서, 그 젊은 꿈속에서 이제는 나이 들어 홀로 남은 혁명가가 세상이 아닌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세대를 거쳐 이어지며 시간을 극복해나가는 정신과 서서히 허물어지며 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육체, 그리고 문득 그 둘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깨닫게 된 혁명가의 독백이 펼쳐진다. 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너무 '외로움'에 집착하는 듯하지만 이 마지막 단편에서도 난 여전히 그 단어를 놓지 못한다.
다 읽었다. 아니, 다 생각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또 다른 흔적들이 들고 일어나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한다. 이젠 자고 있는 다른 책들을 깨워야겠다. 우선은 커다란 침대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저 조그만 녀석부터.
# by | 2007/02/04 16:28 | 읽을거리...불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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