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1월 21일
바람의 열두 방향 I
원제 : the Wind's Twelve Quarters
지은이 :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 Guin)
모두 17개의 단편이 실린 르귄의 단편집이다.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는 거 같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도 아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샀을 때 증정으로 딸려왔던 책. 쉬어간다는 의미로 편안하게 읽으려고 손에 들었던 책. 헌데 아주 제대로 걸리고 말았다. 영 진도가 안 나가고 있거든. 17개의 단편 중 일부인 9개에 대해서만 감상을 적었다. 나머지 8개는 읽는 대로 올릴 생각이다.
셈레이의 목걸이(Semley's Necklace)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적극적이고 예의 바르고. 무엇 하나 빠질 거 없는 존재지만 그런 존재일수록 자존심이나 자부심은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기 쉽다. 특히나 태어날 때부터 출생 신분, 즉 명백한 계급의식에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 있다면 더욱. 작가는 시간이 모두에게 불공평해진 상황에서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진실에서 진실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글을 시작한다. 그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전설을 좇아 세계로 뛰어들지만 자기 자신마저 숨쉬지 않는 전설로 만들어버린다. 그의 자존심은 과거의 진실을 현실로 끄집어내지만 이제 현실은 그의 세상이 아니다. 모든 게 진실이지만 전설과 현실이 뒤죽박죽된 세계. 그런 곳에서 진실은 어떤 의미일까?
파리의 4월(April in Paris)
자기비하, 자기방어, 단절, 경계. 외로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지닌 감정 중에서 자신을 가장 부각시키면서도 자신을 가장 깎아내릴 수 있는 감정. 사랑과 미움만큼이나 시대를 초월한 끝없는 얘깃거리지만 때로는 사치로 오해받을 정도로 그 본질을 이해받지 못한 감정. 작가는 신분과 시간과 국적과 종족을 초월한 외로움을 한 공간 안에 모은다. 과학에 기초한 설명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럴 의도조차 없다. 외로움이 요구하는 건 합리적 설명 따위가 아니다. 함께 하고 서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명인들(the Masters)
생명체의 DNA를 파고들어 복제의 길을 열었듯이 시간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의 욕망은 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것이다. 설사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가는 길이 자신에게 해가 되고 세상을 불확실한 시공간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길을 가고야 말 것이다. 울타리에 갇힌 자는 울타리 너머 세상을 동경하고, 자신 안에 갇힌 자는 자신을 이해해줄 타인을 희망한다. 저 너머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 어쩌면 사람이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지식을 향한 욕망, 진리를 향한 욕망, 신을 향한 욕망, 사람을 향한 욕망. 세상이 무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지라도 그 세상에 사람이 서 있다면 세상은 다시 확장해 나가리라. 또 다시 터져버릴 때까지.
어둠상자(Darkness Box)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했다.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끝을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죽음 그 너머를 알 수 없기에 죽음을, 끝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은 뒤이어 영원함에 대한 동경을 낳는다. 하지만 영원함이란 정말 어떤 것일까?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존재가 '영원'이란 단어에 간직된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알 수는 없겠으나 작가가 그랬듯이 나도 상상은 해 본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는 모든 것이 정체된 시공간일 것이라고. 시간은 흘러가되 그 흐르는 시간이 의미가 없는 곳이라고. 그렇다면 끝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영원함을 먼저 이해하진 않고선 모를 일이다.
해제의 주문(the Word of Unbinding)
죽음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키면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으나 지금 하려는 얘기에 적합한 모습은 아주 괴팍스런 노인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을 집어삼키고 희롱한들 죽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터인데 저 멀리 굳건히 버텨선 채 변함없이 심술궂게 굴기 때문이다. 이 심술쟁이 영감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 삶의 흔적 뿐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도 초연해지는 것. 하지만 욕망을 버리는 것도 힘든데 저 끝 간 데 없는 망각과 허무까지 무슨 수로 이겨내겠는가.
이름의 법칙(the Rule of Names)
'참이름은 사물의 참된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대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본문에 나온 문장으로 이 단편의 핵심 생각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부른다고 해서 그 대상을 지배할 수는 없다. 겉에 드러난 참이름을 아는 것과 별개로 안에 감추어진 본질에 대한 이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 점을 소홀히 했기에 어떤 캐릭터는 죽음을 맞이했고 또 다른 많은 캐릭터들에겐 불행이 닥쳐올 것이다. 스타일이나 품격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내부에 깃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특히나 남의 스타일이나 남의 품격을 내 것으로 하려 할 때는 더욱. 우리는 사람이지 앵무새나 원숭이가 아니다.
겨울의 왕(Winter's King)
뒤집다.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참 쉽게 뒤집는다. 손바닥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고. 하지만 잘 뒤집히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오래 묵은 습관, 너무 익숙해진 관념,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행동, 나와 너의 입장. 어떨 때는 지나칠 정도로 확고해서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 자체마저 봉쇄되기도 한다. 생각이 있어야 비로소 실천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저 봉쇄된 상황은 정말이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하긴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많은 이들은 오히려 뒤집어진 세상을 더 끔찍해할 수도 있겠다. 여기 이 이야기에선 이미 시간의 절대성이 깨지고 지구라는 공간의 한계도 무의미해진 세상이 등장한다. '그'와 '그녀'가 한 몸인 존재가 있고, 자식이 부모보다 나이가 많기도 하다. 모든 건 뒤집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졌다 한들 세상의 일부인 이상 그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걸 뒤집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 그대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힐' 일이다.
멋진 여행(the Good Trip)
요즘을 사는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어디일까? 신? 유토피아? 그것도 나쁘진 않겠으나 진정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소통을 통해 외로움에서 벗어난 우리들,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외로움에 발버둥치는 타인을 외면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외면하는 꼴이고, 외로움에 파묻혀 타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내밀어야 하고 그 내민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물론 '내밀고 잡는다'라는 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다. 마치 사람들의 본질처럼 보이는 문제들과도 싸워야 하고 각종 오해와 이기심도 극복해야 한다. 오직 적극적인 노력과 굳은 의지,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저 위 높은 곳에 도달할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다.
아홉 생명(Nine Lives)
지적이고 세련된 데다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자기 탐닉에만 빠져든다. 세련된 매너를 통해 타인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따지고 보면 혼자만의 길을 간다. '함께'라는 단어가 어색하고 '혼자'라는 단어가 기꺼운 존재. 자기 자신에게 너무 익숙해져 타인의 필요성을 망각한 존재. 외로울 수밖에 없지만 그 외로움을 깨달을 수조차 없는 존재. 그 슬프디 슬픈 존재가 바로 우리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아홉 생명>은 얘기한다.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외로움을 깨닫는 게 가장 먼저여야 한다. 그 과정이 설사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나 말로 표현하기 싫을 정도의 번거로움을 선사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견뎌내지 못한다면 영원히 슬픈 운명에 갇힐 테니까. 외로움의 자각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외로움을 다룬 다른 단편들에 비해 가장 앞선 지점에 위치한 이야기라 하겠다.
지은이 :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 Guin)
모두 17개의 단편이 실린 르귄의 단편집이다.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는 거 같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도 아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샀을 때 증정으로 딸려왔던 책. 쉬어간다는 의미로 편안하게 읽으려고 손에 들었던 책. 헌데 아주 제대로 걸리고 말았다. 영 진도가 안 나가고 있거든. 17개의 단편 중 일부인 9개에 대해서만 감상을 적었다. 나머지 8개는 읽는 대로 올릴 생각이다.셈레이의 목걸이(Semley's Necklace)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적극적이고 예의 바르고. 무엇 하나 빠질 거 없는 존재지만 그런 존재일수록 자존심이나 자부심은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기 쉽다. 특히나 태어날 때부터 출생 신분, 즉 명백한 계급의식에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 있다면 더욱. 작가는 시간이 모두에게 불공평해진 상황에서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진실에서 진실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글을 시작한다. 그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전설을 좇아 세계로 뛰어들지만 자기 자신마저 숨쉬지 않는 전설로 만들어버린다. 그의 자존심은 과거의 진실을 현실로 끄집어내지만 이제 현실은 그의 세상이 아니다. 모든 게 진실이지만 전설과 현실이 뒤죽박죽된 세계. 그런 곳에서 진실은 어떤 의미일까?
파리의 4월(April in Paris)
자기비하, 자기방어, 단절, 경계. 외로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지닌 감정 중에서 자신을 가장 부각시키면서도 자신을 가장 깎아내릴 수 있는 감정. 사랑과 미움만큼이나 시대를 초월한 끝없는 얘깃거리지만 때로는 사치로 오해받을 정도로 그 본질을 이해받지 못한 감정. 작가는 신분과 시간과 국적과 종족을 초월한 외로움을 한 공간 안에 모은다. 과학에 기초한 설명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럴 의도조차 없다. 외로움이 요구하는 건 합리적 설명 따위가 아니다. 함께 하고 서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명인들(the Masters)
생명체의 DNA를 파고들어 복제의 길을 열었듯이 시간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의 욕망은 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것이다. 설사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가는 길이 자신에게 해가 되고 세상을 불확실한 시공간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길을 가고야 말 것이다. 울타리에 갇힌 자는 울타리 너머 세상을 동경하고, 자신 안에 갇힌 자는 자신을 이해해줄 타인을 희망한다. 저 너머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 어쩌면 사람이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지식을 향한 욕망, 진리를 향한 욕망, 신을 향한 욕망, 사람을 향한 욕망. 세상이 무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지라도 그 세상에 사람이 서 있다면 세상은 다시 확장해 나가리라. 또 다시 터져버릴 때까지.
어둠상자(Darkness Box)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했다.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끝을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죽음 그 너머를 알 수 없기에 죽음을, 끝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은 뒤이어 영원함에 대한 동경을 낳는다. 하지만 영원함이란 정말 어떤 것일까?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존재가 '영원'이란 단어에 간직된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알 수는 없겠으나 작가가 그랬듯이 나도 상상은 해 본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는 모든 것이 정체된 시공간일 것이라고. 시간은 흘러가되 그 흐르는 시간이 의미가 없는 곳이라고. 그렇다면 끝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영원함을 먼저 이해하진 않고선 모를 일이다.
해제의 주문(the Word of Unbinding)
죽음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키면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으나 지금 하려는 얘기에 적합한 모습은 아주 괴팍스런 노인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을 집어삼키고 희롱한들 죽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터인데 저 멀리 굳건히 버텨선 채 변함없이 심술궂게 굴기 때문이다. 이 심술쟁이 영감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 삶의 흔적 뿐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도 초연해지는 것. 하지만 욕망을 버리는 것도 힘든데 저 끝 간 데 없는 망각과 허무까지 무슨 수로 이겨내겠는가.
이름의 법칙(the Rule of Names)
'참이름은 사물의 참된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대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본문에 나온 문장으로 이 단편의 핵심 생각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부른다고 해서 그 대상을 지배할 수는 없다. 겉에 드러난 참이름을 아는 것과 별개로 안에 감추어진 본질에 대한 이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 점을 소홀히 했기에 어떤 캐릭터는 죽음을 맞이했고 또 다른 많은 캐릭터들에겐 불행이 닥쳐올 것이다. 스타일이나 품격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내부에 깃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특히나 남의 스타일이나 남의 품격을 내 것으로 하려 할 때는 더욱. 우리는 사람이지 앵무새나 원숭이가 아니다.
겨울의 왕(Winter's King)
뒤집다.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참 쉽게 뒤집는다. 손바닥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고. 하지만 잘 뒤집히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오래 묵은 습관, 너무 익숙해진 관념,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행동, 나와 너의 입장. 어떨 때는 지나칠 정도로 확고해서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 자체마저 봉쇄되기도 한다. 생각이 있어야 비로소 실천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저 봉쇄된 상황은 정말이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하긴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많은 이들은 오히려 뒤집어진 세상을 더 끔찍해할 수도 있겠다. 여기 이 이야기에선 이미 시간의 절대성이 깨지고 지구라는 공간의 한계도 무의미해진 세상이 등장한다. '그'와 '그녀'가 한 몸인 존재가 있고, 자식이 부모보다 나이가 많기도 하다. 모든 건 뒤집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졌다 한들 세상의 일부인 이상 그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걸 뒤집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 그대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힐' 일이다.
멋진 여행(the Good Trip)
요즘을 사는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어디일까? 신? 유토피아? 그것도 나쁘진 않겠으나 진정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소통을 통해 외로움에서 벗어난 우리들,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외로움에 발버둥치는 타인을 외면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외면하는 꼴이고, 외로움에 파묻혀 타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내밀어야 하고 그 내민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물론 '내밀고 잡는다'라는 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다. 마치 사람들의 본질처럼 보이는 문제들과도 싸워야 하고 각종 오해와 이기심도 극복해야 한다. 오직 적극적인 노력과 굳은 의지,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저 위 높은 곳에 도달할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다.
아홉 생명(Nine Lives)
지적이고 세련된 데다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자기 탐닉에만 빠져든다. 세련된 매너를 통해 타인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따지고 보면 혼자만의 길을 간다. '함께'라는 단어가 어색하고 '혼자'라는 단어가 기꺼운 존재. 자기 자신에게 너무 익숙해져 타인의 필요성을 망각한 존재. 외로울 수밖에 없지만 그 외로움을 깨달을 수조차 없는 존재. 그 슬프디 슬픈 존재가 바로 우리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아홉 생명>은 얘기한다.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외로움을 깨닫는 게 가장 먼저여야 한다. 그 과정이 설사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나 말로 표현하기 싫을 정도의 번거로움을 선사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견뎌내지 못한다면 영원히 슬픈 운명에 갇힐 테니까. 외로움의 자각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외로움을 다룬 다른 단편들에 비해 가장 앞선 지점에 위치한 이야기라 하겠다.
# by | 2007/01/21 00:25 | 읽을거리...불끈!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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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책이라... 부러워요*_*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질병이라죠. 근데 해소할 방법이 없는 외로움의 자각은 어떤 면에선 무서워요. 아는 게 병이라고...
그렇네요. 아는 것도 병이겠어요. '외로움을 깨뜨릴 시도라도 해 봐야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곤 싶지만... 내 자신도 하지 못하는 걸 남에게 권하는 것도 참 우스운 노릇이죠.
그런데 이 뭔가 힘들어보이는 책 한 권이 지킬님 덕에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하나하나 감상 적으신 것도 참 대단해요..(저로서는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