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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눌리다

 
새벽 1시. 보통 때 같으면 자려고 기어 들어갔을 텐데 이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펼쳤다. 눈앞에 펼쳐진 책은 뜻밖에도 잔인하고 극단적인 내용으로 차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중 한 인물에 심정이 동하고 말았으니 이것도 글쓴이의 힘일까, 아님 그의 명성 탓일까? 어차피 끝까지 읽을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책을 덮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문장에선 주인공 캐릭터에게 불길하고 앞날을 알 길 없는 운명의 그늘을 덧씌우는 중이었다. 책장 사이로 그 불길함 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책을 꾹 눌렀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불길함은 책의 내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나에게도 뻗쳐오고 있음을 말이다.

잠이 들었다. 음... 솔직히 모르겠다. 잠이 든 거 같기도 하고 깨어있던 거 같기도 하고. 비몽사몽이란 표현이 이 때만큼 적합한 때도 없을 듯싶다. 연속된 상황을 쭉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잠깐 보고 정신을 놓았다가 또 무언가를 잠깐 보고 또 정신을 놓고... 그 때는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꿈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꿈들 있지 않은가? 연속된 이야기들의 조각들만 기억나고 전체는 흐리멍덩한 꿈들. 게다가 꿈이라고 생각하기에 더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난 완전히 두 개의 나로 분리된 상황이었다. 그냥 방관하는 나와 어떤 현상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나로.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땐 똑바로 누운 자세에서 그냥 뒷목이 뻣뻣하다는 느낌 정도였다. 몇 년 전에 목 근육 쪽에 통증이 온 뒤로 피곤하면 항상 뒷목이 뻣뻣해졌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그리곤 곧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정신이 들었다. 뜬금없지만 팝송이 들려오더라. 노래 제목도, 그 음악이 사용됐던 광고도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광고 음악으로 쓰인 적이 있는 노래였다. 팝송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이상한 외침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동물의 울음소리 비슷한 외침. 다시 잠이 들었고 다시 정신이 들었다. 무언가가 날 휘감는 것 같았다. 옥죄이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 때 내 자세는 똑바로 누워서 밧줄에 묶인 꼴처럼 생각됐다. 나를 휘감는 허연 무언가를 본 듯도 했다. 하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그 때 내가 눈을 뜬 거 같지는 않으니까. 다시 잠.

정신이 들었다. 자세는 여전히 똑바로 누운 자세였고 뒷목은 여전히 뻣뻣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상했다. 정신이 들었다 해도 몽롱한 상태여서 꼭 유체 이탈한 것 마냥 내 머리 위 어딘가에서 그저 방관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하나의 생각이 내 몸 중심부에서 툭 하니 튀어나왔다. '니가 뭔데 내 몸 가지고 지랄이야그래!' 강한 불만과 분노가 섞인 외침. 분명 나였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분리되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 상황은 분명 두 명의 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선과 악이 아닌 방관과 대응으로 대표되는 나.

다시 잠, 그리고 다시 정신 차림. 여전히 한 명의 나는 방관 중. 다른 한 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뭔가 애를 쓰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곧 알아차렸다. 발을 휘휘 휘두르고 있었다. 발길질의 의도는 없어 보였고 그저 몸부림 정도. 특이했던 건 발을 미친 듯이 휘젓는 것과 달리 상체는 돌처럼 굳어버린 듯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에 솜사탕 줄기가 엉겨 붙듯이 무언가가 발놀림에 따라 감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발을 움직이는 건지 그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시 잠.

또 정신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방관하던 내가 정신이 들었다고 해야 할 거 같다. 처음에 불만 섞인 외침을 내질렀던 나는 계속해서 무슨 행동을 해 왔던 거 같으니까. 그 녀석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니 맘대로 해라. 내가 널 미워한들 뭐 하겠냐.' 그 말투에 참 여러 가지 감정들이 실려 있었다. 어렸을 때 모든 신을 찾으며 기도하게 했던 간절함도 묻어났고, 어떤 대상에 대한 두려움도 스며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니 맘대로 해라'의 핵심인 체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자존심 강한 꼬마가 힘들다는 소리는 차마 못하고 눈을 부라리며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분위기와 비슷한 셈이다. 그 치기 어린 감정들은 몸 밖에서 방관하는 듯한 나를 몸 안으로 쭉 끌어들였다. 둘이 하나가 되면서 알아차렸다. 뒷목이 뻣뻣한 건 단순한 현상이 아니었다. 난 아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기 위해 기를 썼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얼마나 애를 썼을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던 거 같다. 무엇인가 '툭'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더니 몸이 풀렸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감고 있던 눈을 뜰 수 있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위에 눌렸다는 걸 안 것은 가슴께에 올려놓았던 내 왼 손이 '툭'하며 바닥에 떨어졌을 때였고, 곧장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망설였던 것은 가위에 눌린 도중에 들었던 내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 문구 때문이었다. '니가 뭔데...' 현실에서 눈을 뜬 나는 구체적 형상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나는 분명 뭔가를 보았던 모양이다. 사람이란 호기심의 동물이라지만 솔직히 무엇을 봤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다.

악몽과 다른 또 하나의 느낌. 굳이 경험해볼 필요는 없었겠지만 기왕 몸과 정신이 푹 빠졌다 나왔으니 기록해둘만한 사건이지 싶다. 젠장, 오늘도 아직까지 잠을 못 자고 있다.

by 지킬 | 2006/10/20 02:11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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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소로소로 at 2006/10/20 07:58
저도 침대 머리맡 창가에서 누군가가 제 목을 꽉 조르는 가위에 눌린적이 있었어요. 죽을 힘을 다해서 그 손을 뿌리쳤었는데,, 소름끼치도록 무서웠어요. 하지만 더 섬뜩한건 내 목을 조르던게 내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때죠,.
Commented by sesism at 2006/10/20 08:43
저는 가위에 눌린적이 한번도 없어서... 느낌은 정말 궁금한데 또 가위눌리면 무서울 것 같고. 얼른 떨쳐버리셔야 다시금 일찍 잠드실 수 있을텐데요~
Commented by 수수꽃다리 at 2006/10/20 08:57
저는 고3때부터 한 2년 여 눌렸는데.... 무섭죠.... 몸은 안 움직이는데 내 위에는 누가 올라타서 씨익 웃고 있어요. 더 무서운건 그 씨익 웃고 있는 입만 보인다는 것 ㅡ.ㅡ; 다른 형체는 보이지 않음...(앗 저 아이디 또 바꿨음;;)
Commented by 레드몽키 at 2006/10/20 10:04
저는 고등학교 수업 시간 중에 졸다가 가위 눌린 적도 있었답니다. 덕분에 정신은 깨어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서 선생님한테 걸리면 어떡하나..엄청 걱정을 했었던 가위였었죠ㅡ.ㅡ
Commented by 지킬 at 2006/10/20 11:51
소로소로/ 저도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무의식 속에 있던 내가 저항했던 건 어쩌면 표면에 있던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sesism/ 그다지 상쾌한 느낌은 아닙니다. 청각이 유난히 뚜렷해지는 것 같았고 목의 뻣뻣함 이외에는 다른 신체 부분에 대한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일찍 잠 못 드는 건 아마 너무 피곤해서 그런 듯싶습니다^^

수수꽃다리/ 입만 보이는 가위라... 그것도 별로 경험해보고 싶지 않네요.
제 블로그에 놀러오시는 분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ㅋㅋ

레드몽키/ 에... 얼마나 공부가 하기 싫으셨으면...; 이해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공부하기 싫었어요^^
Commented by shuai at 2006/10/20 16:07
저도 가위에 눌린 적이 몇 번 있는데 무섭게 누군가 날 쳐다본 적은 없고, 뭔가에 짓눌리는 것 같아서 무섭고 정신은 드는데 몸이 안움직여서 혼났었습니다. 억지로 몸을 흔들어 잠에서 벗어나면 좀 괜찮아지다가 다시 잠이 들면 또 눌리지요. 가위에 자야할 시간을 넘겨서 잠이 들때 그런 일들이 생기곤 했습니다. 지킬님은 제 경우 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시무시한 가위에 눌리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편안한 잠자리 되시기를...
Commented by 지킬 at 2006/10/21 14:09
한 번 가위에 눌리고 나니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머리를 맴돌더군요. 다행히 그 이후론 아직 같은 경험을 하고 있진 않습니다. 사실 제가 좀 둔한 편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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