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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where over the Rainbow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두 편의 뮤지컬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빠질 수 없는 약속으로 <오즈의 마법사> 하나로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기억으론 참 덥고 습했다. 천 원짜리 커피를 하나 사 들고 들어가서 극장 홀에 앉아 책을 펼쳤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아트시네마 만큼 무엇에 중독될 수 있는 공간도 드물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리 하나 차지해서 글자에 잠시 중독 되다가 영화가 시작되면 역시 자리 하나 차지해서 스크린에 중독 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닌 것이 정말 맘에 들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라 한편으론 내 이기적인 만족감이 미안해지기도 한다.

영화가 시작됐다.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그리고 그 유명한 노래가 흐른다. 주디 갈랜드의 목소리로 듣는 노래는, 스크린을 통해 듣는 노래는 정말 묘한 감흥을 선사하더라. 왠지 울고 싶기도 하고, 왠지 포근해지기도 하고. 노래가 흘러가고 집이 날아가고 도로시는 꿈의 나라에 도착했다.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강철 나무꾼, 너무나 소심한(덕택에 너무나 웃긴) 사자, 마지막으로 정말 지나칠 정도로 마녀답게 생긴 마녀까지. 실감나는 캐릭터들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동심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그네들이 스크린을 떠돌아다녔다. 내 안 어딘가에 있을 동심을 자극하면서.

도로시가 잠에서 깨자 나 역시 현실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 가까웠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야기가 끝이 나고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사라질 때까지 극장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곳 같았으면 불이 켜지든 말든 몰려 나가는 사람들로 혼란했겠지만 이 곳은 어둠 속 혼란 같은 것은 없었다. 혼란이라면 오직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면서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내 안 속의 그것뿐이다.

아쉬운 마음에 극장 입구를 나서 홀을 빠져나가려고 문 앞에 선 순간 아주 묘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해는 창창한데 굵은 빗줄기가 햇살 사이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내가 아직 현실과 환상의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까? 문득 드는 충동은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처럼 빗속에서 설렘에 들떠 춤에 빠져볼까 하는 것. 하지만 가방 속에 든 내 우산은 짧은 3단 우산이고 모자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난 국민 체조 이상의 몸동작은 절대 불가능한 몸치라는 현실. 환상을 따르지 못하는 현실을 뼈저리게 안타까워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딘가에 무지개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역시나 안타까움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더라. 무지개는 하늘 어디에도 걸려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다. 사람도 아닌 자연이 현실과 환상의 혼란을 부추기는데 보잘 것 없는 내가 어찌 그 부추김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다 비가 그친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혹시나 했지만 다시 살핀 하늘 어디에도 무지개는 없었다. 무지개가 없으니 내가 그 너머로 날아갈 파랑새가 될 일도 없는 모양이다.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벨이 울렸다.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 ♫ <내일을 향해 쏴라> ost에 들어있는 곡이지 아마.

by 지킬 | 2006/08/10 11:18 | 내 안의 소리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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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esism at 2006/08/10 17:57
아트시네마에 자주 출몰하시는군요. 토요일이었나요? 하루종일 뮤지컬 영화를 봐야지 계획을 짜놓고 실천은 못하였어요. 갔더라면 한 상영관에서 좋은 영화를 관람할 뻔 했네요. ^^
Commented by 지킬 at 2006/08/11 09:09
예, 토요일이었어요. <오즈의 마법사> 끝나고 나오니까 햇살과 빗줄기가 같은 시간, 공간에서 존재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이번 토요일에도 약속 때문에 한 편 밖에 못 볼 거 같아요. <까마귀> 꼭 보고 싶었는데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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