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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근대화와 전통의 갈등

 
이 영화는 공포 영화이자 미스터리 영화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과거 귀신 이야기를 서양 공포 영화의 관습과 결합시켜 현재(65년 당시)로 옮겨놓은 영화이고, 원혼의 배경이 영화 마지막에 밝혀진다는 점에서 적절한 수수께끼를 가미시킨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포 영화로서도 수준급(?)이랄 수 있는 이 영화에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원한과 복수 안에 내포된 '근대화와 전통의 충돌'이라는 내용 때문이다.

우선 영화는 전체 이야기에 걸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근대화(경제 발전 또는 서양 문물)와 전통을 대치시킨다. 양복과 한복, 자유로운 성 개념과 일부종사를 떠올리게 하는 성 개념, 적극적이며 영악한 여성상과 순종적이며 우직한 여성상. 이런 대치를 바탕으로 영화는 그 위에 근대화의 수혜자와 근대화에서 소외된 자들의 갈등을 포개 놓는다. 갈등은 결국 영화 막판에 밝혀지는 추악한 음모를 낳게 되고, 그 음모는 무고한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해 원혼으로 만들어 놓고야 만다.

자, 이제 원혼이 등장한다. 귀신은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하고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이 하나 둘씩 죽어 나간다. 그거야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들을 향한 위협은 어찌된 노릇일까? 더러운 피가 반이라도 섞여있으니 그대로 두지 못하겠다는 심산? 그래,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원혼 이전의 여인, 즉 전통을 상징하던 여인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원혼이 서양화가를 찾아가 자신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은 순간부터 전통은 이미 인습이 되어버린 터였다. 발전의 여지없이 갇혀버린 전통은 인습으로 변해 현재의 구성원들을 질식시키고 미래의 구성원들에게서마저 피를 뽑아 먹으려 하는 것이다.

음모는 원혼을 낳았고, 원혼은 죽음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즉, 근대화는 전통을 가로막았고, 가로막힌 전통은 인습이 되어 구성원들을 옥죄이기에 이르렀다. 원혼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던 시간이 계속될 즈음 꽉 막힌 숨통을 트이기 위해 영화는 뜻밖의 조력자를 등장시킨다(사실 좀 뜬금없는 등장이다). 그 조력자의 정체는 나중에 밝혀지듯이 불교의 보살 중 하나. 보살의 도움으로 남자는 원혼을 물리치고 실종됐었던 아이들을 돌려받게 되며 초상화 속 여인도 극락왕생하게 된다. 이쯤 되면 영화가 내놓는 결론은 뻔하다. 근대화 속에서도 전통은 존중받아야 하고, 올바르게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영화 초반 마당에 있던 불상에 그들이 인사를 했다는 행위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전통의 존중이란 측면과 통한다. 그리고 초상화 속 원혼처럼 인습으로 변한 전통이 수많은 죽음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전통의 올바른 계승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음모와 원혼과 도움의 손길을 살펴봤으니 이젠 공포·미스터리물의 핵심 중 하나 정도만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원혼의 공격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여기서는 남자(이름을 모르겠다;)를 살펴볼 생각이다. 남자는 원혼이 된 여인의 남편이었던 사람이자 음모의 실체를 마지막에 알게 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혼이 그를 마지막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랄 수 있겠다. 그는 근대화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에 전통의 수호자 또한 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적극적이지 못했고, 심하게 말하면 방관한 셈이었다. 결국 수수방관의 태도는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왔고 자신의 가족들을 원혼의 먹이로 제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혼과 사람들의 대결은 보살의 도움으로 양쪽 모두 만족할 만한 결론을 얻어낸 채 끝을 맺는다. 죄 지은 자 죗값을 치렀고, 원혼은 극락왕생했으며, 무고한 자들은 살아남아 미래를 준비하는 게 가능하게 됐다. 그 흔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그 흔하디 흔한 해피엔딩의 느낌이 다소 묘하다. <살인마>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전통적 대가족 구조는 이미 해체된 상태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양복(서양식 옷) 차림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근대화라는 물결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급격한 근대화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살인마의 근원은 원혼을 거슬러 올라가 갈등과 음모에 다다르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바로 근대화란 존재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도달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살인마일지 어느 누구도 쉽게 결정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제목 : 살인마(1965년)
감독 : 이용민
출연 : 이예춘(남자), 도금봉(애자), 정애란(어머니), 이빈화(혜숙), 남궁원(의사), 추석양(화가), 나정옥(가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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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킬 | 2006/08/05 10:14 | 영화...또다른 현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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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8/05 12:24
일단 비디오로 떠놓기만 했는데, '목없는 여살인마'가 이 작품의 어설픈 리메이크라고 해서 조금 뒤에 볼 생각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트랙백을 올리던지 할께요. 글만 읽어도 얼추 감이 오고 있기는 하지만. 잘 읽었어요. ^^
Commented by reme19 at 2006/08/05 13:01
얼마전 이 작품을 EBS에서 봤는데 '목없는 여살인마'가 같은 대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접하지 못한 그 무언가를 가진 영화더군요. 멋진 평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In-flux at 2006/08/05 22:41
이 영화 저도 ebs에서 보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 영화 분명 한국영화고 한국적인데 한편으로는 서구적인 느낌 같은것들 때문에 이 당시 다른 지역의 영화들과 동시대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받은 느낌이 근대화로 인해 지킬님이 말씀하신 근대화와 전통의 대립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킬님 혹시 흑귀도 보셨나요? 흑귀도 구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볼수 있는 루트가 없네요 ㅎㅎ
Commented by 지킬 at 2006/08/06 11:32
ArborDay/ <목없는 여살인마>가 리메이크였나보군요. 전 그 영화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reme19/ <목없는 여살인마>가 더욱 궁금해지네요. 그 영화에 비해 범접하지 못한 그 무언가가 있단 말이죠?...

In-flux/ 소재는 한국적인데 기법에 있어선 서양 공포 영화에 많이 근접해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특수효과 같은 것들도 요즘 같진 않지만 예상 외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구요.
저도 ebs에서 본 터라 <흑귀>는 방송해주지 않는 한 보지 못할 듯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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