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18일
킹콩,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처음 한 시간 여 동안 영화는 꽤 뜸을 들인다. 물론 하고자 하는 얘기를 위해서 미리 깔아놓을 포석이겠지만 어쨌든 킹콩을 보여주기까지 한참이나 지체한다. 그러다 드디어 킹콩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후부터 영화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규모의 미학을 휘둘러댄다. 피터 잭슨의 뿌리를 새삼 실감케 하는 형상들이 원시의 자연 속에서 꿈틀대고, 다양한 괴기 영화들을 총망라한 듯한 초호화 캐스팅이 스크린을 누빈다. 하지만 그 미어터지는 풍성함 속에서 단연 나를 사로잡은 것은 덩치 큰 킹콩의 표정이었다. 고집불통, 괴팍, 다가감의 서투름에서 비롯된 민망함. 노인과 아이를 섞어놓은 것 같은 그 표정을 보면서 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보다 더 인간적이란 말인가.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괴물 이야기. 이 글은 사람에 대한 글이 될 듯싶다.1. 무인도에 도착하기까지
영화는 인물과 상황 설명에 집중한다. 그 설명의 한가운데에 앤 대로우, 잭 드리스콜, 칼 덴햄이라는 세 인물이 있다. 앤은 끼니 잇기도 어려운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미디 배우다. 웃음이라곤 끄집어낼 곳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웃음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순은 동시에 그녀의 힘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웃음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와 같은 앤의 매력에 맨 처음 넘어오는 인물이 잭이다. 생동감을 동경하고 비인간적인 현상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인물. 하지만 잭은 세상을 사는 대다수 사람들처럼 자신의 신념 앞에서, 자신의 양심 앞에서 종종 주저한다. 이에 반해 칼은 주저함이 없다. 그는 순수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성공이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엔 세상에 보다 가깝거나 멀고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곧 우리 모두의 일면을 보여준다. 결국 세 주인공은 스크린에 투영된 우리들의 분신이 되는 셈이다.
2. 야만의 섬
일행은 목적했던 섬에 의도치 않게 도착한다. 섬의 본질은 야만이며 야성이다.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에게는 가식과 체면이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낯설고 잔혹한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도망 다니기에 바쁘지만 세 사람만은 섬의 또 다른 본질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킹콩으로 대변되는 감정의 '원형'이다(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순수'란 단어는 쓰지 않겠다). 그 안에는 잔인하고 포악하며 괴팍하지만 나눔과 소통을 갈구하는 거친 욕구가 살아 숨쉰다. 소통의 힘을 가진 앤이 그것을 맨 먼저 깨닫고 잭이 나중에 인식한다. 그러나 칼은 무시한다. 돈과 성공에 잠식된 그의 내면이 그의 눈꺼풀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후 칼은 티라노와 동격이라 하겠다. 킹콩은 앤을 무작정 집어 삼키려는 티라노들은 물리쳤지만 더욱 영악한 칼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래서 킹콩은 도시로 끌려와 전시된다.
3. 장삿속이 지배하는 도시이제 도시다. 티라노와의 싸움은 전초전에 불과했고, 칼 일행과의 일전은 오프닝이었다. 본 게임의 상대는 화려하고 멋지지만 무엇이든 집어 삼키려 드는 매혹적인 공간이자 괴물이다. 가차 없이 벗겨내 전시하고 인정사정없이 털어내 버리는 세련된 냉혹한이기도 하다. 킹콩은 모든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도시를 상대로 포효한다. 그러나 그 포효는 최후를 직감한 존재가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내지르는 울부짖음일 뿐이다. 그 울부짖음을 끝으로, 앤을 바라보는 슬픈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킹콩은 도시의 정점에서 추락하고 만다. 그것은 괴물의 추락이 아닌 도시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성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도시에 찌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걸 파괴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람의 내면은 그렇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영화가 무슨 얘기를 하든, 영화에서 무엇을 찾아내든 킹콩의 그 표정만큼은 거부하기 힘드리라.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내면을 간직한 괴물의 표정. 인간다움을 향한 무한한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괴물에게서 연민과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 아닐까.
원제 : King Kong(2005년)
감독 : 피터 잭슨
출연 : 나오미 왓츠(앤 대로우), 잭 블랙(칼 덴햄), 애드리안 브로디(잭 드리스콜), 제이미 벨(지미), 카일 챈들러(브루스), 에반 파크(헤이스), 앤디 서키스, 콜린 행크스, 토마스 크레치만(선장)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 by | 2005/12/18 10:22 | 영화...또다른 현실 | 트랙백(11) | 덧글(1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제목 : 킹콩 King Kong (2005)
누군가 감동적으로 본 영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M:I-2 였다고 대답하고 싶다. 말로는 다른 거창한 영화를 꺼낸다 해도 부디 마음속으로나마. 그렇다 다른 영화도 아닌 오우삼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2 말이다. (이번에는 진담이다. 믿어달라.)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부터 니아를 구해내기 위한 이단 헌트의 험난한 여정까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급기야 마지막 살신성인의 장면(그런데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또 기억의 오류이지는 않을까?)에서는 눈시울을 적시기까지 했다. 그날 저녁 뭘 잘못 먹었던 것일까? 아니 눈물흘림증이라도 걸렸던 ......more
제목 : 킹콩 - 감정이 풍부해진 캐릭터가 빛나는 걸작 오락..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확장판 킹콩(1933) - 야성에 대한 열망 킹콩 - 야성적 에로티시즘 B급 영화 감독 칼 덴험(잭 블랙 분)은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영화사를 속이고 3류 코미디 여배우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 분)와 친구이자 시나리오 작가 잭 드리스콜(에이드리언 브로드 분)을 배에 채우고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해골섬으로 출항합니다. 어렵사리 섬에 닿은 그들은 원주민의 습격을 받고 앤은 원......more
제목 : 킹콩 (2005)
어림없게도 제가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소위 정통 킹콩 영화는 "킹콩 2" (혹은 "킹콩은 살아있다." King Kong Lives) 입니다. 개성적인 괴물과 당대 최고의 특수효과를 과시했던 오리지널 킹콩도 아니고, 새롭게 킹콩 붐을 일으키는데 성공한 70년대판 킹콩 리메이크도 아닌, 80년대의 킹콩2는 욕만 먹고 인기도 별로 못 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콩"들이 세 마리나 나와서 나돌아 다니게 됩니다만, 세 편 중에서는 가장 조잡한 영화......more
제목 : 킹콩 -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시대의 블록버스터
2005년 12월 15일 대한극장 피터 잭슨의 차기 프로젝트가 '킹콩' 이 될 것 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만해도 반신반의했었다. 물론 그다운 프로젝트이긴 했으나, 거대 고릴라라니 너무 우스워보이지 않으려나. 그리고 올 겨울 피터 잭슨의 킹콩은 '엄청나다' 라는 소문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개인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피터 잭슨 만만세!' 이다. 세시간이 넘는 런닝타임동안 도무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혹자는......more
제목 : 킹콩(2회차)- 2005.12.17.CGV불광
킹콩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대명사다. 친구들과 골목골목을 뛰고 뒹굴며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보자기를 둘러매고 '슈퍼맨'을 흉내낸 것 이상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을 외친 기억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 어린시절에 깊이 각인된 킹콩은 메리언 쿠퍼의 1933년작 오리지널 <킹콩>이 아니라 1976년에 리메이크된 존 길러민의 <킹콩>이다. 원전을 찾아볼만큼 관심이 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 대부분의 사......more
제목 : 킹콩 | 스필버그의 시대는 끝났다.
킹콩 (King Kong, 2005) 감독 피터 잭슨 각본 피터 잭슨/ 프란시스 월시 평점 Good! 나오미 왓츠 잭 블랙 에드리언 브로디 앤디 서키스 제이미 벨 사실, 이런 영화를 두고 몇 푼 문장으로 긁적거리는 건 별 소득 없는 일이다. 백주대낮 서울역 한복판에서 ‘예수불신 지옥’을 외치는 분들 마냥 아직 영화를 못 본 사람들, 싸그리 극장으로 인도하는 것이 더 옳다. 맹목적인 경외와 찬사, 믿음을 바쳐도 당신의 에 대한 끓어오르는 애정은 여전히 활화산이리라. ......more
제목 : 45. <킹콩> 사람보다 너무도 인간적인, 이해를 ..
한 감독의 평생숙원이 이루어졌다. 아홉 살 때 킹콩을 보고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피터 잭슨은 이제 전세계가 인정하는 정점의 위치에 서서 자기 꿈을 실현시켰다. 영화사 간부들에게 보여준 감독 편집판이 단 한 컷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극장에 걸렸다는 비화처럼 <킹콩>은 군더더기 없는 3시간짜리 판타지 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의 경제적 파탄 속에서도 인간의 바벨탑을 쌓아올린 모순의 시대이다. 하루아침에 잘나가던 코......more
제목 : 킹콩..
피터잭슨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는 이런 영화를 만나게 해 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래고래 외쳐댔었다. 물론 그것은 비디오로 집에서 접한 탓이기도 하겠다. (데드얼라이브의 컬쳐쇼크는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반지의 제왕을 접하고도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아무래도 대중이 밀집된 공공장소인 영화관에서 감히 그럴만한 용기를 내지 못했고 이번 킹콩 역시 드러내놓고 환호를 지르기엔 장소가 장소였지만 할 수 만 있다면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인 것은 확실했다. 이 영화의 리메이크......more
제목 : [킹콩] 드리스콜 작가와 콩씨
앤과 그녀의 두 남자에 대해서 이 거대한 멜로드라마를 보고 나는 왜 악몽을 꾸었을까? 꿈 속에서 나는 킹콩이었고 사랑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한 여인을 찾아 야만인들의 왕국을 헤매다 끝도 없는 밑으로 추락했다. 아주 다행히 그 추락지점은 폭신한 내 침대 위였다. 원작을 깔끔하게 그것도 감수성 예민하고 다분히 영리하게 더군다나 막대한 현재의 영화적 기술과 자본력으로 거대하게 완성해낸, 그런 관점에서 킹콩을 이야기하는 것은 역시 ......more
제목 : 킹콩 - 세부류의 사람들(특히 황우석과 그를 지지하..
'킹콩'이라는 영화를 본다 하면 왠만한 성인들은 단순한 스토리에 고질라나 용가리를 떠올리며 실컷 때려 부수는 장면이 고작일 거라는 생각을 할 게다.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어릴 적 본 듯한(기억마저 가물가물) 커다란 원숭이가 빌딩 꼭대기에서 흰 옷 입은 금발의 아가씨를 한 손에 부여잡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으며, 거기에다 CG(컴퓨터 그래픽)기술을 입히면 대충 '안봐도 비디오'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도......more
제목 : bye bye, blackbird
<span lang="EN-US" style= "FONT-SIZE: 8pt; COLOR: black; FONT-FAMILY: Arial; mso.....more
옌날 킹콩보던 생각 나는데 봐야겠군요..
지킬님 잘 읽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이제 자주 찾아뵐께요^^
boogie/ 재미있더라구요. 전 기회되면 옛날 킹콩을 찾아봐야겠습니다.
In-flux/ king is kong...; 킹과 콩 사이에 저런 게 숨어있을 줄이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 커다란 손으로 작은 앤과 얼마나 소통을 원했었을까요?
방학 동안엔 자주 출현해주실 겁니까?^^
몽중인/ 극장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꽤 들리더군요. 킹콩 보면서 슬퍼할 줄은 보기 전까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그러고보니 축소해서 잘만 다듬으면 킹콩 주민등록증용 사진으로 적합할 듯도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