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영화...또다른 현실

처음 한 시간 여 동안 영화는 꽤 뜸을 들인다. 물론 하고자 하는 얘기를 위해서 미리 깔아놓을 포석이겠지만 어쨌든 킹콩을 보여주기까지 한참이나 지체한다. 그러다 드디어 킹콩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후부터 영화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규모의 미학을 휘둘러댄다. 피터 잭슨의 뿌리를 새삼 실감케 하는 형상들이 원시의 자연 속에서 꿈틀대고, 다양한 괴기 영화들을 총망라한 듯한 초호화 캐스팅이 스크린을 누빈다. 하지만 그 미어터지는 풍성함 속에서 단연 나를 사로잡은 것은 덩치 큰 킹콩의 표정이었다. 고집불통, 괴팍, 다가감의 서투름에서 비롯된 민망함. 노인과 아이를 섞어놓은 것 같은 그 표정을 보면서 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보다 더 인간적이란 말인가.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괴물 이야기. 이 글은 사람에 대한 글이 될 듯싶다.

1. 무인도에 도착하기까지

영화는 인물과 상황 설명에 집중한다. 그 설명의 한가운데에 앤 대로우, 잭 드리스콜, 칼 덴햄이라는 세 인물이 있다. 앤은 끼니 잇기도 어려운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미디 배우다. 웃음이라곤 끄집어낼 곳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웃음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순은 동시에 그녀의 힘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웃음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와 같은 앤의 매력에 맨 처음 넘어오는 인물이 잭이다. 생동감을 동경하고 비인간적인 현상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인물. 하지만 잭은 세상을 사는 대다수 사람들처럼 자신의 신념 앞에서, 자신의 양심 앞에서 종종 주저한다. 이에 반해 칼은 주저함이 없다. 그는 순수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성공이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엔 세상에 보다 가깝거나 멀고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곧 우리 모두의 일면을 보여준다. 결국 세 주인공은 스크린에 투영된 우리들의 분신이 되는 셈이다.

2. 야만의 섬

일행은 목적했던 섬에 의도치 않게 도착한다. 섬의 본질은 야만이며 야성이다.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에게는 가식과 체면이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낯설고 잔혹한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도망 다니기에 바쁘지만 세 사람만은 섬의 또 다른 본질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킹콩으로 대변되는 감정의 '원형'이다(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순수'란 단어는 쓰지 않겠다). 그 안에는 잔인하고 포악하며 괴팍하지만 나눔과 소통을 갈구하는 거친 욕구가 살아 숨쉰다. 소통의 힘을 가진 앤이 그것을 맨 먼저 깨닫고 잭이 나중에 인식한다. 그러나 칼은 무시한다. 돈과 성공에 잠식된 그의 내면이 그의 눈꺼풀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후 칼은 티라노와 동격이라 하겠다. 킹콩은 앤을 무작정 집어 삼키려는 티라노들은 물리쳤지만 더욱 영악한 칼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래서 킹콩은 도시로 끌려와 전시된다.

3. 장삿속이 지배하는 도시

이제 도시다. 티라노와의 싸움은 전초전에 불과했고, 칼 일행과의 일전은 오프닝이었다. 본 게임의 상대는 화려하고 멋지지만 무엇이든 집어 삼키려 드는 매혹적인 공간이자 괴물이다. 가차 없이 벗겨내 전시하고 인정사정없이 털어내 버리는 세련된 냉혹한이기도 하다. 킹콩은 모든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도시를 상대로 포효한다. 그러나 그 포효는 최후를 직감한 존재가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내지르는 울부짖음일 뿐이다. 그 울부짖음을 끝으로, 앤을 바라보는 슬픈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킹콩은 도시의 정점에서 추락하고 만다. 그것은 괴물의 추락이 아닌 도시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성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도시에 찌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걸 파괴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람의 내면은 그렇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영화가 무슨 얘기를 하든, 영화에서 무엇을 찾아내든 킹콩의 그 표정만큼은 거부하기 힘드리라.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내면을 간직한 괴물의 표정. 인간다움을 향한 무한한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괴물에게서 연민과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 아닐까.


원제 : King Kong(2005년)
감독 : 피터 잭슨
출연 : 나오미 왓츠(앤 대로우), 잭 블랙(칼 덴햄), 애드리안 브로디(잭 드리스콜), 제이미 벨(지미), 카일 챈들러(브루스), 에반 파크(헤이스), 앤디 서키스, 콜린 행크스, 토마스 크레치만(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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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레스톨 2005/12/18 11:15 # 답글

    킹콩 표정연기 최고였죠. 웨타의 경이로운 특수효과에 놀랄 뿐입니다.
  • boogie 2005/12/18 12:19 # 답글

    벌써부터 대단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라 소문난 잔치에 먹을것 없다는 소릴 듣지 안을까 했는데..감독의 역량이 역시나 대단한가 봅니다..
    옌날 킹콩보던 생각 나는데 봐야겠군요..
  • In-flux 2005/12/18 15:28 # 답글

    저는 킹콩의 손을 잊을수가 없네요. 그가 앤에게 손을 내밀때의 그 표정... 칼 덴험이 마지막에 킹콩을 바라보던 표정도 슬퍼 보였구요
    지킬님 잘 읽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이제 자주 찾아뵐께요^^
  • In-flux 2005/12/18 15:31 # 답글

    아 지금 킹콩의 메이킹 필름이 파일로 돌고 있는데요. 이게 진짜 메이킹 필름이 아니라. www.kingiskong.com 이라는 사이트에서 하루 하루씩 올라왔던 프로덕션 다이어리를 하나로 뭉쳐놓은 것이더라구요 메이킹필름으론 부족하지만 그래도 비주얼의 궁금증은 약간 풀어주는 것 같습니다. 기회되시면 시청해보세요^^
  • 푸르미 2005/12/18 23:14 # 답글

    저도 표정연기에 최고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랜디서커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요. 어쩜 그 움직임마저 그렇게 동물스럽게 표현한 것인지... 감상문을 쓰다가 몇번이고 고치다가 여전히 못쓰고 있죠. 윽~~
  • 몽중인 2005/12/19 00:30 # 삭제 답글

    고 덩치큰 놈 표정때문에 극장에서 내내 펑펑 울었습니다. 아마 지금껏 절 울린 가장 덩치 큰 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지킬 2005/12/19 17:18 # 답글

    레스톨/ 표정들... 정말 압권입니다.

    boogie/ 재미있더라구요. 전 기회되면 옛날 킹콩을 찾아봐야겠습니다.

    In-flux/ king is kong...; 킹과 콩 사이에 저런 게 숨어있을 줄이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 커다란 손으로 작은 앤과 얼마나 소통을 원했었을까요?
    방학 동안엔 자주 출현해주실 겁니까?^^
  • 지킬 2005/12/19 17:23 # 답글

    푸르미/ 랜디 서키스는 아무래도 디지털 전문 배우로 길이 남을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푹 익은 김치가 맛있던데 푹 삭은 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몽중인/ 극장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꽤 들리더군요. 킹콩 보면서 슬퍼할 줄은 보기 전까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 레드몽키 2005/12/20 02:09 # 삭제 답글

    크어억~빨리 보고 싶습니다만..24일날 보기로 해서 말이지요..^^
  • 지킬 2005/12/20 10:33 # 답글

    모든 영화는 기대를 너무 키운 후 보면 안 좋은데 말이죠^^
  • prelude 2005/12/21 12:18 # 답글

    포스터 사진 퍼갈게용~
  • 지킬 2005/12/22 00:14 # 답글

    사진이라 함은 아래쪽 포스터?
    그러고보니 축소해서 잘만 다듬으면 킹콩 주민등록증용 사진으로 적합할 듯도 보이는군요...;
  • 레드몽키 2005/12/25 00:19 # 삭제 답글

    기대를 엄청 하고 봤는데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 지킬 2005/12/25 10:50 # 답글

    그럼 다행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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