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한 가지의 핵심은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이란 존재의 고립이다. 영웅은 모두가 외롭다지만 브루스의 경우는 그 외로움이 더욱 확고하다. 흔히들 배트맨을 돈 지랄하는 영웅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브루스는 태어날 때부터 상류층 집안 출신이었고 고담 시의 유명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결국 태생적으로 그는 뭇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스파이더맨이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과 달리 배트맨은 그의 외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습격을 받는다. 사람들의 약물 중독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부패한 권력과 돈에 대한 뿌리 깊은 내부의 두려움과 다름없고, 때로는 대상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나타나는 적대심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계층과의 단절은 위아래의 단절로 끝이 아니다. 브루스는 자신이 속한 계층과도 일정 부분 절연한다. 자신의 생일 파티 자리에서 그는 참석자들을 향해 그들의 표리부동에 대해 말한다. 그들을 구하기 위한 부득이한 발언이었지만 밑바닥 생활을 섭렵한 브루스에게 있어서 그 말은 꼭 허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두 상황을 통해 브루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는 의지대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만다. 그리고 그 같은 상황은 공교롭게도 지배 계급의 영웅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민중을 위하고 고려할 줄 알며, 권력과 자본의 부패를 경계하며, 적절한 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군주의 이미지 말이다. 이는 '돈 지랄하는 영웅'임을 너무나 확실하게 선언하고, 자본이 지배하는 시공간에서 무엇이 가장 효율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내포한다.

<배트맨 비긴즈>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시리즈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걸로 보인다. 과연 제시된 길로 갈 것인지, 다시 방향을 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팀 버튼의 '배트맨'을 그대로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적이라 하겠다. 팀 버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리가 따른다. 이견은 많겠지만 다른 누군가 거꾸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따라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메멘토>는 말할 것도 없고 <인썸니아>를 봐도 그의 재능은 명백하다. 원작에 대한 작품 해석 능력과 단순화, 그리고 그것의 효과적 전달. <배트맨 비긴즈>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담은 영화다.
원제 : Batman Begins(2005년)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크리스찬 베일(브루스 웨인/배트맨), 리암 니슨(듀카드), 마이클 케인(알프레드), 게리 올드만(고든), 케이티 홈즈(레이첼), 실리안 머피(크레인), 모건 프리만(루시우스), 톰 윌킨슨(카마인), 룻거 하우어, 와타나베 켄(라스알굴), 마크 분 jr., 거스 루이스(어린 브루스), 라이너스 로치(토마스 웨인), 래리 홀덴, 제라드 머피, 사라 스튜어트
덧글
추천 기능이 있었으면 추천했을 거예요 ^^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조엘 슈마허의 악몽을 벗어나서, 좀더 "스파이더맨"에 근접한 완성도를 지닌 시리즈로 거듭났으면 좋겠군요.
ps.아. 저도 3탄은 당시엔 재밌게 봤답니다.
아무래도 4탄이 결정적인게 아닐련지. 빈말로도 재밌다고
하긴 그렇더군요.
읽고 나니 안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땡기네요 ㅋㅋㅋ
그런데 팀 버튼이 했던 배트맨은 몇 번째였나요?...
윤현호/ 의도적인 연출이 아니었을까 생각중이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든 그 때문에 배트맨을 다른 위치에 세워 놓는 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noregret/ 저도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요. 조엘 슈마허는 악몽이었군요...
Eskimo女/ 1, 2편을 팀 버튼이 직접 감독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 말씀은 읽고 나니 안 보고 싶었는데 나리엘 님 덧글때문에 갑자기 땡긴다는 말씀?... ^^;
허나 저에겐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요번 배트맨은
어떨까 하는 약간의 우려감이 들었는데..음..역쉬나 좋은평을 박고 있더군요...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납니다..ㅠ.ㅜ
boogie/ 전작들이 다 별로였나보군요. 이번 영화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나쁘진 않단 생각입니다.
lunamoth/ 허술하다니요, 무슨 말씀을요. 저 역시 트랙백 감사드립니다. 조심스럽게 예측해보지만 놀란 감독은 앞으로 헐리웃과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드네요.
저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팀 버튼을 답습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어요. 지킬님 말씀대로 팀 버튼의 기괴함과 음울함을 과감히 포기한 대신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개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레테/ 물놀이하겠다고 호텔을 통째로 살 때 그 럭셔리함에 순간 욱!--;
팀 버튼과의 차별은 감독이나 제작하는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