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비긴즈, 팀 버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 영화...또다른 현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영화는 배트맨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설명해준다. 시리즈의 시작인 <배트맨>에서도 유추 가능하지만 어둠의 영웅 이면에는 분노와 죄책감이 자리 잡았음을 명백히 한다. 그것을 극복하느냐, 그것을 통제하느냐 여부에 따라 상반된 에너지의 근원이 될 수 있단다. 복수와 파괴, 수호와 재건이 그것이다. 그리고 극복 가능과 불가능의 대립은 브루스 웨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박쥐를 자신의 외피로 선택하는 것과 어우러져 영화 내내 이야기의 핵심을 차지한다.

또 한 가지의 핵심은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이란 존재의 고립이다. 영웅은 모두가 외롭다지만 브루스의 경우는 그 외로움이 더욱 확고하다. 흔히들 배트맨을 돈 지랄하는 영웅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브루스는 태어날 때부터 상류층 집안 출신이었고 고담 시의 유명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결국 태생적으로 그는 뭇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스파이더맨이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과 달리 배트맨은 그의 외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습격을 받는다. 사람들의 약물 중독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부패한 권력과 돈에 대한 뿌리 깊은 내부의 두려움과 다름없고, 때로는 대상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나타나는 적대심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계층과의 단절은 위아래의 단절로 끝이 아니다. 브루스는 자신이 속한 계층과도 일정 부분 절연한다. 자신의 생일 파티 자리에서 그는 참석자들을 향해 그들의 표리부동에 대해 말한다. 그들을 구하기 위한 부득이한 발언이었지만 밑바닥 생활을 섭렵한 브루스에게 있어서 그 말은 꼭 허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두 상황을 통해 브루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는 의지대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만다. 그리고 그 같은 상황은 공교롭게도 지배 계급의 영웅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민중을 위하고 고려할 줄 알며, 권력과 자본의 부패를 경계하며, 적절한 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군주의 이미지 말이다. 이는 '돈 지랄하는 영웅'임을 너무나 확실하게 선언하고, 자본이 지배하는 시공간에서 무엇이 가장 효율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내포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개인적 걱정만큼 배트맨의 복합 이미지를 훼손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 전달 능력을 극대화시킨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기존에 구축된 배트맨의 이율배반적인 이미지들을 착실하게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팀 버튼이 일구어냈던 배트맨과 고담시의 기괴한 음울함까지는 포섭하지 못한다. 그 음울함은 단지 고담시를 어두운 조명에 노출시키고 범죄가 만연한 도시로 설정한다고 해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이 지닌 최대 강점은 어느 정도 현실과 유리된 채 판타지를 동반한 캐릭터성이나 사건들이 그 첫 번째이며, 거꾸로 그 안에 내포된 현실성 강한 상징들이 그 두 번째다. 그 둘이 뒤섞여, 즉, 동화 같은 외양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현실 비판이 어우러져 영화는 강력한 음울함을 뿜어내고 기괴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첫 번째 요소를 상당 부분 걷어냈다. 그것은 이야기의 논리적 전달에 기가 막힌 재능을 갖춘 그로선 당연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르며, 그 때문에 영화는 기괴한 음울함을 상당 부분 잃는다. 그 결과 고담시는 판타지 속 음울한 도시가 아닌 현실 속 삭막한 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의 삭막함은 무서움과 어이없는 웃음을 뿜어내긴 하지만 기괴하지는 않은 법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시리즈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걸로 보인다. 과연 제시된 길로 갈 것인지, 다시 방향을 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팀 버튼의 '배트맨'을 그대로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적이라 하겠다. 팀 버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리가 따른다. 이견은 많겠지만 다른 누군가 거꾸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따라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메멘토>는 말할 것도 없고 <인썸니아>를 봐도 그의 재능은 명백하다. 원작에 대한 작품 해석 능력과 단순화, 그리고 그것의 효과적 전달. <배트맨 비긴즈>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담은 영화다.


원제 : Batman Begins(2005년)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크리스찬 베일(브루스 웨인/배트맨), 리암 니슨(듀카드), 마이클 케인(알프레드), 게리 올드만(고든), 케이티 홈즈(레이첼), 실리안 머피(크레인), 모건 프리만(루시우스), 톰 윌킨슨(카마인), 룻거 하우어, 와타나베 켄(라스알굴), 마크 분 jr., 거스 루이스(어린 브루스), 라이너스 로치(토마스 웨인), 래리 홀덴, 제라드 머피, 사라 스튜어트


덧글

  • Nariel 2005/06/29 10:36 # 답글

    다른 어떤 리뷰보다도 정돈된 글입니다.
    추천 기능이 있었으면 추천했을 거예요 ^^
  • 윤현호 2005/06/29 10:53 # 삭제 답글

    예전의 고담시가 아기자기하면서도 우울해서 좋았는데 이번 신작의 고담은 그냥 뉴욕시같더라구요.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 RocknCloud 2005/06/29 13:54 # 답글

    고담시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더군요. 그렇기 때문인지 배트맨에 집중이 한결 쉬웠다는 느낌입니다.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 noregret 2005/06/29 14:07 # 답글

    앞으로의 방향이 기대되는 영화입니다.
    조엘 슈마허의 악몽을 벗어나서, 좀더 "스파이더맨"에 근접한 완성도를 지닌 시리즈로 거듭났으면 좋겠군요.

    ps.아. 저도 3탄은 당시엔 재밌게 봤답니다.
    아무래도 4탄이 결정적인게 아닐련지. 빈말로도 재밌다고
    하긴 그렇더군요.
  • Eskimo女 2005/06/29 14:08 # 답글

    오호..나리엘 님 말씀에 동감.
    읽고 나니 안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땡기네요 ㅋㅋㅋ
    그런데 팀 버튼이 했던 배트맨은 몇 번째였나요?...
  • 닥터지킬 2005/06/29 16:42 # 답글

    Nariel/ 에...고맙습니다. 원래 정리정돈을 잘 해요. 제 방만 빼고...;

    윤현호/ 의도적인 연출이 아니었을까 생각중이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든 그 때문에 배트맨을 다른 위치에 세워 놓는 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 닥터지킬 2005/06/29 16:47 # 답글

    RocknCloud/ 전 다른 영화들도 볼 게 많아서 본 영화를 다시 보러 극장에 가게 될 지 의문이에요.

    noregret/ 저도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요. 조엘 슈마허는 악몽이었군요...

    Eskimo女/ 1, 2편을 팀 버튼이 직접 감독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 말씀은 읽고 나니 안 보고 싶었는데 나리엘 님 덧글때문에 갑자기 땡긴다는 말씀?... ^^;
  • 옥살라 2005/06/29 18:25 # 답글

    같은 시리즈라도 감독마다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다음 편엔 또 어떤 감독이 어떤 배트맨을 만들어 낼지 벌써 궁금... ^^
  • boogie 2005/06/30 00:47 # 답글

    일단 감독의 일련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허나 저에겐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요번 배트맨은
    어떨까 하는 약간의 우려감이 들었는데..음..역쉬나 좋은평을 박고 있더군요...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납니다..ㅠ.ㅜ
  • lunamoth 2005/06/30 02:29 # 삭제 답글

    닥터지킬님의 글을 읽으니 비긴즈에서 느낀 새로운 점이 확연히 다시금 이해가 가는군요. 저도 감독의 재능과 선택에 대해 동의 하는 바입니다. 좋은 글 트랙백 감사드립니다. 역시 허술한 제 글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닥터지킬 2005/06/30 08:49 # 답글

    옥살라/ 잘만 만들어준다면 그 재미 무시 못하죠. 저 역시 다음 편이 궁금합니다.

    boogie/ 전작들이 다 별로였나보군요. 이번 영화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나쁘진 않단 생각입니다.

    lunamoth/ 허술하다니요, 무슨 말씀을요. 저 역시 트랙백 감사드립니다. 조심스럽게 예측해보지만 놀란 감독은 앞으로 헐리웃과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드네요.
  • shuai 2005/06/30 13:34 # 답글

    이 영화에 대한 글이 블로그 여기 저기 눈에 띕니다. 팀버튼의 배트맨은 아니지만 메멘토와 인썸니아를 좋게본터라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레테 2005/06/30 17:10 # 삭제 답글

    생계형 영웅 스파이더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확실히 럭셔리하죠. ^^
    저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팀 버튼을 답습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어요. 지킬님 말씀대로 팀 버튼의 기괴함과 음울함을 과감히 포기한 대신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개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닥터지킬 2005/06/30 18:36 # 답글

    shuai/ 1, 2편 복습까지 하셨다니 꼭 보셔야겠네요^^

    레테/ 물놀이하겠다고 호텔을 통째로 살 때 그 럭셔리함에 순간 욱!--;
    팀 버튼과의 차별은 감독이나 제작하는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Bane 2005/06/30 23:29 # 답글

    이 영화를 보고 미처 느끼지 못한 부분이 나와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 닥터지킬 2005/07/01 07:56 # 답글

    사람마다 관점도, 생각도 다르다보니 다들 보고 느끼는 게 다른 듯합니다. 영화감상의 또다른 재미랄까요.
  • Eskimo女 2005/07/01 12:34 # 답글

    푸하하 ㅋㅋㅋ
  • 닥터지킬 2005/07/01 17:57 # 답글

    호탕하셔라 ㅎㅎ
  • 잠본이 2005/07/04 23:35 # 답글

    사실 개인적으론 그 기괴한 음울함은 팀버튼 개인의 것이지 배트맨 본래의 컬러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비긴즈의 분위기를 더 좋아합니다. ;]
  • 닥터지킬 2005/07/05 10:42 # 답글

    예, 팀 버튼의 영향력이 막대했죠. 놀란 감독은 그 영향력을 어느 정도 떨쳐버린 셈이구요. 어쨌든 앞으로가 기대되는 시리즈로 탈바꿈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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