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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색

 
처음엔 자유로웠다. 가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이 내 뜻대로였다. 그러다 하나의 끈이 내 팔에 들러붙었다. 활동 폭은 좁혀졌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건 원활했다. 시간이 흘러 다른 한 팔에 끈이 연결됐다. 그리고 온 상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더니 서서히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줄 때문에 난 공중으로 떠올랐다. 유일하게 발만이 자유롭지만 땅에 닫지 않는 발의 움직임은 그저 하나의 버둥댐을 만들어 낼 뿐이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꼼짝없이 정해진 자리에서 움찔거리기만 한다. 발은 오른쪽으로 가고자 하나 속절없이 허공만 차댄다. 꼼짝없이 묶였음을 깨닫는다. 관계라는 거미줄에.

웅크리고만 있던 거미가 서서히 움직여 그 수많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마다 내 모습을 하나씩 담아가면서. 내 몸을 자양분 삼아 거미는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난 서서히 탈색되어 간다. 하얗게, 하얗게. 완전히 탈색된 후에는 어떻게 될까? 거미줄의 사소한 떨림에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져 내릴까? 나라는 존재가 남아 있을까? 난 그 해답을 찾고자 주변으로 눈동자를 돌린다. 다른 거미줄에 걸린 누군가를 바라보기 위해. 그리고 거미의 눈동자처럼 탐색하기 시작한다.

by 닥터지킬 | 2005/05/16 10:48 | 지킬&하이드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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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FromBeyonD at 2005/05/16 13:20
관계를 통해 성장해야 할텐데, 점점 색깔만 잃어버리는 현실이란. ㅠㅠ
Commented by 닥터지킬 at 2005/05/16 17:52
나를 붙잡아 두고 이끌어 가는 것도 관계지만 나를 함몰시키고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도 관계더군요.
Commented by boogie at 2005/05/17 01:10
인간의 관계란 것이 좋은쪽으로만 연결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관계란 것이 자칫 나의 자유로움까지 앗아갈때가 있죠..
Commented by 레테 at 2005/05/17 10:34
전 관계를 거부하는 대신 막대한 손해를 입더라도 싫으면 피하는 편이거든요. 흔히 싸XX 없다고 하는 유형이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는 집중하는 편이라 나라는 존재가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옭아매는 거미줄이 되지 않길 바랄때가 있습니다.
Commented by 닥터지킬 at 2005/05/17 12:19
boogie/ 모든 걸 탈탈 털어버리고 싶다는 말들을 종종 하는데... 그것도 아마 관계가 자신을 구속할 때 내뱉을 수 있는 말인 듯.

레테/ 나는 구속당하기 싫으면서 나도 모르게 타인을 구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어 가는 경향이 있더군요.
Commented by you-turn at 2005/05/17 15:19
오랫만에 들렀습니다. <스파이더> 벌써 구입하셨나요? 저도 사야하는데... 조만간 저도 사게 되면... 어찌됐든 잘 지내셨죠? (*)
Commented by 닥터지킬 at 2005/05/17 17:58
극장에서 봤는데 구입여부는 일단 뒤로 미루었습니다. 히치콕과 크로넨버그 영화들부터 먼저 해결해야겠어요;
그나저나 월간지 발행하듯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글을 쓰시는군요. DVD리뷰는 뭐가 되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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