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충돌하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말한다. 한 개인의 연봉이 몇 백, 몇 천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크며, 별 생각 없이 끌고 다니는 차 하나의 수리비가 한 개인의 인생 자체를 속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합리를 바꾸어야 할 사람들은 일에 치여 피곤한 몸을 끌고 들어와선 TV 앞에 앉아 소일하는데 남는 시간을 소비한다. 모두들 시스템에 전염되고 속박되어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하는 다른 하나의 관점은 세상이 냉정하다고 말한다. 돈이 있어야 자유롭고, 열등한 자는 도태되며, 힘이 없는 자는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치며 시스템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이 두 관점의 충돌은 달리 말해서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다. 혁명을 꿈꾸는 이상은 자본이 지배하는 시스템을 부인하려 들지만 완고한 현실은 엄청난 식성으로 낡은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이상까지 잡아먹으려 든다. 이러니 현실을 상대로 한 이상의 싸움은 언제나 벅찰 뿐이다. 게다가 개인감정이 조금만 지나쳐도 이상은 기우뚱거리기 일쑤고, 현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 본래의 색깔을 퇴색시키기도 쉽다. <에쥬케이터>는 바로 그와 같은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그려낸다. 동시에 하르덴베르그라는 인물을 통해서 이상과 현실의 화합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하긴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상과 현실이란 이름으로 분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합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영화는 이상에 어두운 미래만을 덧씌우지는 않는다. '에쥬케이터'란 이상가 그룹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시스템에 일침을 가할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면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지구상에 살아있는 한 아무리 좌절한다 한들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이상도 함께 했으면 하는 것이 감독의 희망인 모양이다. 그래야만 삭막함이 줄어들고 발전의 방향이 제시될 테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에쥬케이터>란 영화를 통해 관객 자신이 얼마나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 초중반에 얀이 하는 말들이 어딘가 불편하고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은 시스템에 어느 정도 충실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얀이란 인물은 시스템의 개혁보다는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 시스템에 얽매인 자가 얀을 이해하기란 아무래도 버거울 밖에. '노예'나 '충실'이란 단어가 너무 직설적인가? 그럼 '현실적'이란 단어로 바꾸도록 하자. 나를 포함한 상당수가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인물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원제 : Die Fetten Jahre Sind Vorbei(2004년작)
감독 : 한스 바인가르트너
출연 : 다니엘 브륄(얀), 율리아 옌치(욜), 스티페 에르켁(피터), 버그하르트 클로즈너(하르덴베르그)



덧글
베르테르_成準 2005/05/14 00:28 # 답글
시사회서 보고 생각 많이 한 영화..어른들이 왜 보수당에 한표 찍는지
여실히 보여준 영화가 아닌지
FromBeyonD 2005/05/14 01:57 # 답글
닥터지킬님의 블로그에서는 보고 싶은 영화들을 많이 만납니다.영화가 좋은건지, 아니면 글이 좋은겐지.
ATOZ 2005/05/14 02:00 # 답글
포스터가 좋은 건지.shuai 2005/05/14 08:48 # 답글
모두 좋은 건지.닥터지킬 2005/05/14 09:43 # 답글
베르테르_成準/ 보수당에 표를 던지는 과정에 대한 대사를 들었을 때 웃을 수밖에 없더군요. 어찌나 안타깝게도 핵심을 정확히 집어내던지 원...FromBeyonD/ 아마 영화를 잔뜩 보고 싶은데 한 주에 한두 편 정도 밖에 볼 수 없다는 욕구불만이 글로 터져나오는지도 모르겠어요. 매일 영화를 보고 매일 글을 쓴다면 절실함 같은 감정은 그만큼 약해질 듯. 가만, 쓰고보니 글을 잘 써서 그렇다는 자화자찬 같은데... 영화도 괜찮습니다. 아니, 영화는 괜찮습니다;
닥터지킬 2005/05/14 09:46 # 답글
ATOZ/ 포스터는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shuai/ 스킨도 칙칙하니 아주 좋습니다^^;
mldnd 2005/05/14 13:27 # 답글
영화 [신과 함게 가라]보셨나요?닥터지킬 2005/05/14 15:06 # 답글
예, 다니엘 브륄이 풋풋한(?) 수도사로 나오는 영화였죠.reme19 2005/05/15 02:46 # 답글
이런말.. 평범한 것같아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글 읽으니 더욱 더 이 영화 보고 싶네요~"
닥터지킬 2005/05/15 11:27 # 답글
제 글과 제 관점은 아무래도 뻥튀기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극장에서 제 옆에 주루루 앉아있었던 낯선 아낙네들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죠. '처음엔 조금 지루했는데 일 꼬이면서부터는 재미있더라~'흠... 영화사에 들어가서 알바나 해볼까요^^;
Eskimo女 2005/05/15 21:33 # 답글
프흐흐 결국 보셨군요. 넘 재미있죠!닥터지킬 2005/05/16 10:49 # 답글
결국 봤습니다. 4인의 동거... 참 흥미로웠어요.lunamoth 2005/05/16 18:11 # 삭제 답글
얼핏 프로젝트 메이햄(파이트 클럽) 느낌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응 방식에서만. 열렬한 지지속에서 감상한 저로서는 역시 시스템 밖에서 부유하며 동화되지 못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군요... orz;닥터지킬 2005/05/17 00:24 # 답글
내심 열렬한 지지를 보내지 못한 제 자신이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이러다 곧 극중 인물인 하르덴베르그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