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쭈 내 안의 소리들

얼마 전 친구를 만났더니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떤 목표를 위해 살고 있냐고. 요즘은 아는 사람들 만나면 이 질문을 꼭 해본단다. 자신이 뭘 위해 살고 있는지 도대체 아리송하다나.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용은 다르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수없이 나에게 물어왔던 질문이 하나 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주말 편의점은 적응하기 참 힘들다. 평일과 달리 주 고객층이 확 바뀌는 데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혼자 매장에 있다보니 막상 일을 하려면 체력과 신경이 두 배로 소모된다. 일 하다가도 손님이 들어오면 뛰쳐나가야 되고, 손님이 나가면 또 하던 일 하고. 평일엔 십여 분이면 끝낼 일을 주말엔 두 배, 세 배 이상 공을 들여야 마칠 수 있다.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커서 주말 근무자 한 명을 줄인지 2년쯤 되어가나? 그 2년 동안 성격 참 더러워졌고 스트레스도 무지 쌓였다. 오죽 했으면 설 연휴 동안 매장에서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그리 고생을 했을까? 그 이틀간 했던 딸꾹질이 내 평생 했던 딸꾹질 횟수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인데 내년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문득 인터넷에서 읽었던 언론 기사가 떠오른다. 체감 물가가 너무 올라 서민들 삶이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고. 그런가? 그런데 왜 물가가 오르면 그 이득을 봐야 할 나 같은 자영업자들은 전혀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또 다른 기사도 떠오른다. 내년에 최저 임금을 대폭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인들도 발 벗고 나선 모양이다. 크게 한숨 한 번. 내년엔 알바를 한 명 또 줄여야 할 거 같다. 편의점을 시작한지 7년쯤 되어 간다. 나 혼자선 절대 지금까지 꾸려오지 못했을 거다. 한두 달 하고 휙 나가버리는 알바들이 대부분이지만 1년이 넘게 오랜 기간 동안 자리를 지켜준 녀석들도 많았다. 그런 친구들이 자기 할 일을 찾아 매장을 나갈 때면, 세상 엿 같으면 여기로 와, 많은 돈은 못 줘도 기댈 곳은 있게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곤 했었는데 이젠 허언이 돼버렸다. 사람을 받아줄래야 받아 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거든.

'마이쭈, 마이쭈...' 반복해서 들려오는 아이 목소리 때문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아이스크림 먹겠다고 들어온 꼬맹이 하나가 아이스크림은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내고 다른 먹을거리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다. 예쁘진 않은데 눈도 얼굴도 동그랗고 아이 특유의 볼살 때문에 픽 웃게 만드는 그런 인상이랄까. 마이쭈를 연신 외쳐대지만 엄마는 꿈도 꾸지 말란다. 결국 아이 손에 들린 건 월드콘. 하지만 아이는 별로 실망한 거 같진 않다. 가게를 나가면서 이번에 마이쭈 대신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쳐대는 걸 보니 말이다. 원한다고 다 얻을 수 없는 게 인생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사는 게 편해지는 건 또 아니다. 저 아이처럼 뭐라도 얻어내면 그냥 고맙다고 속 편하게 냅다 받아들이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봄을 타나? 자꾸 우울한 생각만 들고 내 주변에 없는 사람들만 떠오르고. 날씨도 참 구질구질하다. 이번 주 내내 이렇다. 해가 떠서 화창하다가도 서서히 구름이 달려들더니 비가 내리고 바람도 불고. 사는 것도 구질구질. 오래 살 생각은 없지만 40 초반에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나머지 인생 참 골치 아파질 텐데 큰일이로세. 확실히 주말 편의점은 엿 같다. 쳇.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마이쭈 꼬마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엄마가 아니라 아빠와 함께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마이쭈를 원한다. 고집 있는 녀석. 아빠 왈, 그거 안돼, 엄마한테 혼나. 거부 의사긴 한데 엄마처럼 강력한 힘을 내뿜는 건 아니고 뭔가 어설프다. 문득 떠오른 CF 광고. 내 여자 앞에선 강해 보이고 싶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건 연애할 때 얘기인 듯. 결혼하면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빠는 꼬마와 타협을 한다. 마이쭈 대신 꿈틀이로. 아이는 이번에도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그런 게 인생이라니까. 그래도 잃은 건 없잖아. 살다 보면 잃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예를 들면... 저 아빠를 보면 된다. 아이는 엄마에게 했듯이 아빠에게는 고맙단 인사를 꺼내지도 않았다. 결혼하면 남자는 약해진다니까. 우울함을 덜어 보겠다고 글을 썼는데 이거 어째...TT

밤 10시. 야간 근무자가 와서 편의점을 벗어날 시간이다. 평일엔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퇴근하는데 주말은 말 그대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내 질문이 시작된 지점도 바로 여기부터였다. 모든 시간을 긍정으로 일관하면서 살 순 없겠지만 벗어나고 싶은 내 삶의 일부가 있다는 게 제대로 된 일일까? 잘 살고 있는 건가?

이방인 읽을거리...불끈!

원제 : L'etranger(1942년)
지은이 :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엄마는 왜 생애가 사그라져 가는 그때에 ‘ 약혼자’를 둔 것인지 왜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생명이 꺼져 가는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보고 싶어졌던 게 틀림없다.

잠을 자다 문득 깨어났다. 춥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몸살기가 있었는데 제대로 시작된 모양이다. 침대에서 나오다가 손이 맨살에 닿았는데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차다. 몸은 열이 나서 체온이 높을 텐데 몸에 닿는 모든 게 얼음알갱이 같다. 불덩이가 감각이 있는 생물이라면 자신에 닿는 모든 것을 불사를 때 얼음장 같은 차가움에 치를 떨까? 상대적인 감각들. 그리고 당연하면서도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있는 현상들.

그런 것들이 참 많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가지고 있어서 보통 그 존재를 의식조차 못하다가 그것을 잃거나 그 극단의 무엇과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들.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깨달았던 걸까? 어떤 삶이든 그것만으로 소중하다는 거? 방식은 다르지만 누구나 영유하는 삶 그 자체? 어느 순간부터 '그저' 살아가는 중인 나로선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먹고 살다 보니 일과 시간에 치여서 나에 대한 자각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엔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예전에 엘리베이터를 타면 양쪽에 거울이 있어서 수많은 내가 쭉 나열해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보고 있으면 나란 존재를 가끔은 인지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가 있었다. 요즘? 엘리베이터 안에 모니터가 설치된 이후부터 그것만 보고 있다. 아마 거울 속 수많은 나도 똑같이 그럴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외면한 채로. 춥다. 아직도 몸살 기운이 남아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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